배경
쓰시마 섬은 조선과 일본 양국 사이에 있어 중개를 맡는 특수 사정도 있거니와, 원래 그 토지가 협소척박(狹小瘠薄)하여 식량을 밖에서 구해야 생활을 유지하므로 고려 말부터 조공과 동시에 미곡(米穀)을 받아갔다. 또 조선에서도 쓰시마 섬을 우대하였으며 쓰시마 섬은 통상의 이익을 독점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 땅에 기근이 들 때에는 해적으로 나타나 해안을 약탈하므로 병사를 일으켜 정벌하게 되었다.
조선의 대마도 원정 결과
대마도주(對馬島主)가 항복을 청하여 옴으로써 사태가 일단락되게 되었다. 대마도 도주는 또한 신하의 예로서 섬길 것을 맹세하고 경상도의 일부로서 복속하기를 청하였고, 왜구를 스스로 다스릴 것과 조공을 바칠 것을 약속하였다. 세종이 이를 허락하고 이후 삼포를 개항할 때에 대마도 도주에게 통상의 권한을 줌으로써 평화로운 관계로 전환되었다.
이 정벌 이후 상당 기간 동안 왜구의 침입을 방지하는 효과를 가져왔으며, 통상을 허락하여 일본인들로 하여금 평화적으로 무역과 내왕을 하도록하는 정책을 펼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삼포 개항(三浦開港)이란?
삼포 개항(三浦開港)은 1426년(세종 8년) 대마도주 소 사다모리(일본어: 宗貞盛 종정성)의 청에 따라 기존에 개방하였던, 웅천(진해)의 내이포(乃而浦), 부산포 이외에도 울산의 염포(鹽浦)를 추가로 개항하고 일본인에게 교역을 허락한 일이다.
1418년 세종 초년 제3차 대마도 정벌 이후 대마도주 사다모리(종정성)는 단절된 조선과의 정상적 교역을 누차 청하여 왔기 때문에 조정에서도 그들에 대한 유화책의 하나로 3포를 세종 8년 개항했다. 그래서 웅천(熊川, 현재의 진해)의 내이포(乃而浦, 제포[薺浦]라고도 함), 동래(현재의 부산)의 부산포(富山浦), 울산의 염포(鹽浦) 등 3포를 열어 무역할 것을 허락하였다. 3포에는 각각 왜관을 두어 왜인 60명에 대하여 거주를 허락하였다.
삼포 개항(三浦開港)의 결과
1510년 중종 11년 4월 4일 제포(내이포)에 거주하고 있던 항거왜추(恒居倭酋), 대조마도(大趙馬道), 노고수장(奴古守長) 등이 병선 100척과 무장한 왜인 4~5천명을 거느리고, 성을 공격하였다.
이들은 부산포, 제포를 함락시키고, 영등포를 불사르고, 웅천진 등을 공격하였다. 이 변란으로 인해 부산포, 제포, 웅천, 영등포가 함락되고, 부산포 첨사 이우증이 살해당하였다. 군사와 백성들 272명이 죽고, 동평현, 동래현, 민가 796호가 전소되었다.
1510년 4월 13일 확전을 염려한 대마도주 종성친은 서계를 보내 강화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황형(黃衡), 유담년(柳聃年)을 경상좌우도방어사(慶尙左右道防禦使)로 임명하여 군사를 보내 이들을 토벌하였다. 1510년4월 19일 제포에 모여있는 왜인들을 세 갈래로 포위를 하여 8시간의 협공 끝에 하여 적을 물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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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를 정벌하기는 했지만, 대마도의 식량 사정을 염려해 왜구를 그만 두고
조선에 와서 필요한 물품을 구입해갈 수 있도록 배려해준 조선,
그러나 점차 무리한 요구를 하더니 결국은 침략으로 갚은 倭人
조선의 민가 796개를 불태워 버리고 272명의 죄 없는 조선인을 죽인 뒤
전쟁이 확대될 것을 우려해 강화를 요청해 오는 倭人
그런 倭人들을 다시 토벌할 수 밖에 없었던 조선..........
조선인은 倭人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