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덜컹거리는 춘천행 완행열차를 타고 통기타에 맞춰 노래 부르며 떠나던 여행길. 40, 50대 중년들의 기억 속에 아련히 남아 있는 추억이다. 그 때 그 시절, 가슴 속에 새겨진 낭만의 징표 가운데 하나가 기차다. 한 폭의 그림같이 심산유곡을 달리는 자태도 그러하려니와, 어디까지 뻗어 있을까 끝이 보이지 않는 철길이 주는 오묘한 자유의 느낌도 감성을 깊이 자극한다.
삶은 계란 까먹던 추억의 열차는 사라졌지만 날렵함을 뽐내는 고속열차가 철도의 미래를 열고 있다. 고속철을 만들고 운행할 수 있는 몇 안되는 나라 가운데 하나가 한국이다. 프랑스 TGV를 수입하면서 본격화한 우리 고속철의 역사는 이제 10년, 숱한 고장과 사고로 비난받으면서도 커져가는 세계 철도시장에서 경쟁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현장을 취재했다.
기차가 도대체 얼마나 빨리 달릴 수 있을까? 빠른 교통수단이라고 해서 그만큼 속도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시속 1,000km로 날아가는 제트기를 탄다고 해서 음속에 가까운 속도를 체감할 수는 없다. 겨우 시속 80~90km로 달리는 오토바이 위에서 스릴을 느끼고, 고작 시속 70km 정도의 놀이공원 롤러코스트는 자지러질 정도의 공포감을 주기도 한다.
지표면에 맞닿아 달리면서 유리창으로 외부와 단절된 교통수단으로 대상을 좁히면 스피드의 왕은 단연 고속열차다. 몇 만 원만 내면 시속 300km를 경험할 수 있다. 이런 속도 때문에 KTX가 처음 운행을 시작했을 때 해프닝도 벌어졌었다.
정신없이 스쳐 지나가는 차창 밖 풍경이 어지럽다며 "역방향 좌석"에 대해 형평성 논란이 벌어진 것이다. 결국 역방향 좌석에 대해서는 할인요금을 적용해 주는 걸로 결론이 났다. 고속철이 최고 속도에 그토록 목을 매는 건 기술력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누가 먼저 전인미답의 스피드에 도달했느냐는 그 열차의 우수성 뿐만 아니라 궤도와 운영 기술 등 모든 분야의 우월성을 의미한다.
2014년 9월 현재 기차의 최고 속도는 프랑스의 TGV가 갖고 있다. 물론 시험주행 속도다. 2007년 파리 동부의 메스 구간에서 시속 574.8km를 찍었다. 음속이 초당 340m 정도이니까 계산해보면 음속의 절반 가까운 속도다. 이게 얼마나 빠른 건지 상상이 잘 안돼 고속철 전문가에게 물었다. 우선 속도가 빠르면 빠를수록 전방을 주시하는 운전자의 시야가 극도로 좁아진다고 한다.
좌우의 신호등을 제대로 볼 수 없을 뿐 아니라 고속철의 방향을 핸들로는 통제할 수도 없다. 오로지 중앙의 한 점 만이 정지해 있고 좌우의 배경들이 빨려들듯이 옆으로 사라진다. "카트 라이더"라는 오락 게임을 해 본 사람들은 난이도가 높은 단계의 속도감이 어떤지 알 터인데, 고속철의 그건 상상을 초월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얘기다. 육중한 고속철이 괴물처럼 달리다가 정지하려면 어마어마한 거리가 필요하다. 제동장치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서울역에서 멈추려면 수원에서부터 브레이크를 밟아야 부드럽게 정지할 수 있다.
인간이 제어하기 어려운 이런 속도는 참사를 부르기도 한다. 상하이 부근으로 기억하는데 중국에서 몇 년 전 고속철 탈선사고가 발생해 큰 인명피해가 난 적이 있다. 그 뒤로 중국 정부는 성급한 증속보다는 기술적 안정성에 크게 신경쓴다고 한다. 프랑스를 제외하면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 독일 등이 속도면에서는 비슷한 기록을 갖고 있다. 특히 우리 차세대 고속철인 "해무"는 올해 말에 시속 450km에 도전한다고 한다.
차세대 고속철 추진단장에 따르면 이 기록은 무난히 달성할 걸로 보인다. 지난해 시속 421km에서 조금 속도를 높인 수준이다. 그는 수 년 안에 프랑스처럼 시속 600km까지 속도를 끌어 올리는 계획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열차의 출력을 최대한 높이는 실험과 함께 공기저항을 최소화하는 기술 개발에 힘을 쏟고 있다. 우리나라는 프랑스, 중국과 달리 평야보다는 산악지형과 하천이 많다.
전체 고속철 구간의 60%가 교량이나 터널이다. 육상보다는 불안정한 교량에서의 주행이 저항을 더 많이 받고, 귀를 찢는 듯한 기압 변화를 일으키는 터널 또한 속도 높이는 걸 방해한다. 따라서 궤도와 터널의 설계, 열차 모터의 출력 향상, 유선형 디자인의 혁신, 심지어 전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장치의 개발까지 고속철 기술은 종합 예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연구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고향가는 길에 시속 500~600km를 경험하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의 TGV가 시속 574km를 돌파한 구간은 파리에서 스트라스부르로 가는 길이다. 기자가 파리특파원으로 근무하던 시절 몇 차례 그 구간에서 TGV를 타 본 바, 장애물 하나없이 곧게 뻗은 길이 적당한 내리막에 끝없이 펼쳐져 있다.
그만큼 속도를 낼 환경이 만들어져 있는 셈이다. 앞서 설명한대로 고속철은 기차의 출력 뿐 아니라 제반 철도의 여건과 운영기술이 받쳐주어야 한다. 어마어마한 기록을 갖고 있는 프랑스도 몇 년 안에 상용속도를 시속 350km로 높이는데 주력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해무도 시험주행 속도를 높이는 동시에 상용속도 향상에 신경쓰고 있다. 계획대로라면 2019년 쯤 해무가 투입돼 시속 350km 안팎의 속도로 전국을 한 시간 반 생활권으로 묶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시속 600km의 짜릿함을 경험해 볼 날은 요원하지만 부산 가서 가볍게 점심 먹고, 서울에서 오후 업무 보는 미래는 머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