伝統文化


 
打つかも(七支刀)を取り囲んだ任那日本府(任那日本部)雪意論難

                                                                                                                              稽古諮


日本書紀によれば, 神工47年(247年)組に‘百済王が捧げた供え物を新羅が途中に奪った., 神工 49年(249年)組に ’新羅を打つために 荒田別 鹿我別が派遣されて 卓淳国に集結, 木羅斤資に言い付けて新羅を打って, ビザ発(比自


한일 고대사 (10) 七支刀 관련 이슈 정리


 
칠지도(七支刀)를 둘러싼 임나일본부(任那日本部)설의 논란

                                                                                                                              稽古諮


일본서기에 의하면, 신공47년(247년)조에‘백제왕이 바친 공물을 신라가 도중에 빼앗았다., 신공 49년(249년)조에 ’신라를 치기 위하여 荒田別 鹿我別이 파견되어 卓淳國에 집결, 木羅斤資에게 명령하여 신라를 치고, 비자발(比自㶱) 이하 가라 7국을 평정‘, 신공 52년(251년)조에 ’백제 초고왕이 구저(久氐)등을 파견하여 영원한 복속을 서약하는 표시로서 “七枝刀, 七子鏡 및 여러 중보”를 바쳤다‘고 한다.

일본서기 2周甲 引下說(120년을 후대로 내림)을 제창한 那珂通世는 干支 2運을 끌어내려 4세기 후반의 史實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칠지도의 발견과 日 학계의 초기 銘文해석


일본 나라현 천리시 石上神宮(이소노카미 신사)에는 길이 74.9cm의 칠지도가 있다. 1873년에서 1877년 사이 이 신궁의 태궁사로 있던 菅政友는 大和國石上神宮寶庫所藏七支刀(1907년)에서 “시커멓게 녹슬었는데 금색이 조금 보이는 게 있어 의심이 나서 그 위의 녹을 조심스레 제거하다 보니 비로소 문자가 나타났다.”고 말하고 있다.

다른 책 七支刀銘文再考(1968년)을 보면, 그는 이에 그치지 않고 제작시기 등 일부 명문을 삭제 가필한 것으로 드러났다. 즉, 泰和4年五月十一日丙午正陽 중 和, 五, 一 의 일부 자획을 삭제하고 연호는 泰始4년이라 하고, “泰始 4년은 漢土 연호로서--- 晋의 泰始 4년은 6월11일, 8월12일, 9월13일 그 어느 것이나 丙午---” 라며, 칠지도를 신공기와 결부시키려 무리한 조작을 감행한 것이다. 그러나 서진의 태시 4년은 268년이고 日書上 칠지도 헌상년은 신공 52년 252년이다. 연대상 모순이 생긴다.

칠지도는 발견 시부터 역사 조작의 목적을 가지고 연구되었고, 그 후에도 그런 경향은 시정되지 않았다.

관정우 이후 1914년 최초로 칠지도를 조사한 高橋健自는 泰始 4년 6월11일 병오정양으로 읽어, 병오일이 되는 것은 西晉의 泰始 4년(268년)이라 지적하고, 명문상 칠지도란 신공조의 칠지도 이것에 상당할 가능성을 인정할 수 있다고 했다.

1918년 喜田貞吉은 조사 후 명문의 연호는 泰初4년 이라는 설을 내놓았다(석상신궁의 신보칠지도1919년). 또 1928년 두 차례를 조사한 大場磐雄은 석상신궁보물지(1929년)에서 연호는 西晉의 泰初 4년 6월11일 병오정양이라 했다.


세 차례의 정밀조사 후 1951년 福山敏男은 「석상신궁의 칠지도」에서 명문 모두를 泰和四年五月十一日丙午正陽으로 읽고 명문 중 鐵 宜供 侯 滋 倭자를 명확히 한 후,

명문을 泰和四年五月十一日丙午正陽 造百練鐵七支刀 生(?)辟百兵 宜供供侯王 △△△△作  先世以來 未有此刀 百滋△世△ 奇生聖音 故爲倭王旨造 (?)不△世 로 판독하고,

金石에서 泰는 太 大로 통용되기 때문에 泰初 太初 泰和 太和 어느 것에나 속할 수 있다고 적용의 융통성을 부여하고 검토를 진행하여, 魏 明帝의 太和 4년(230년)은 여왕 卑彌呼와 연계성이 있고, 東晋 太和 4년(369년)은 백제의 372년 동진 使臣行이 있으니 그 3,4년 전에 동진 연호 사용 가능성을 개진하고, 부견의 太初 4년(390년)이나 서진의 太初 4년(391년) 북위의 太和 4년(480년)은 왜와 관계가 멀기 때문에 배제한다 하였다.      


福山의 가설은 일본서기의 七枝刀는 金文의 七支刀이며, 백제왕은 百滋王으로 되어있어 神功記의 獻上기사와 부합하고, 칠지도를 헌상한 백자왕을 肖古王으로 보면 세자 寄生은 초고왕의 왕자 貴須와 음이 비슷하니, 칠지도가 만들어 진 것은 369년(동진 太和 4년)이고 헌상된 것은 3년 뒤인 372년(신공 52년)으로 볼 수 있으니, 일본서기 신공기에 보이는 사실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고, 대화 정권의 한국 출병과 任那支配는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이다.


福山설의 문제점(이진희 論)
1. 명문의 내용상 獻上이 아니라 下行文書의 형식, 즉 ‘下賜’의 言文이 되어 있음을 간과한 점.
2. 泰和 4년을 동진 太和 4년으로 확정함에 있어 제작 干支日(五月十一日丙午正陽)을 단지 吉祥句에 불과한 것으로 단정하고, 北魏의 太和 4년을 신공기의 연대와 멀다하여 대상에서 제외 한 점으로써,

함축문으로 표현하는 명문에 간지일과 맞지 않는 日附를 굳이 집어넣은 이유를 증명하지 못하는 한 설득력이 떨어지고,

372년 이전에 백제가 동진 연호를 사용했으리라는 막연한 추측만으로 369년에 백제가 동진 연호를 새겨 넣었다고 판정하는 것은 (牽强附會하는) 무리한 결론이라는 점.

원가력[元嘉曆 ; 宋 文帝 元嘉 20년(443년)에 채택되어 445년부터 사용한 역법, 일본에는 백제 관륵에 의해 전해져 604년에 채택]에 의하면 북위 태화 4년(480년)은 5월11일이 丙午日와 일치하며, 백제는 472년에 북위에 사신을 파견한 일이 있다 한다.

 

김석형의 반론

북한의 사학자 김석형은「三韓 三國의 日本列島內 分國에 대하여」(1963년)에서 명문의 태화가 동진 연호임을 반대하며 백제의 독자적인 연호라고 주장했고, 명문해석과 관련하여 “일본학자는 이 ‘왜왕’을 광개토왕비문에 보이는 한반도에 ‘출병’한 일이 있는 ‘왜’의 왕에 해당시켜 이 왜왕에게 백제왕이 칼을 ‘봉헌’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나 명문에는 스스로 천자라 칭하는 백제왕이 그 ‘후왕’에 되어 있는 왜왕에 준 것으로 쓰여져 있다. 당시 이 왜왕은 어쨌든 백제왕에‘신속’해 있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라 했다. 연호에 대한 논증이 없는 것이 문제점이기는 하나, 상위자가 하위자에게 준 내용이라는 지적은 卓見이라 했다.


栗原朋信의 재반론

이 논자는 김석형의 논지인, 칠지도가 하사품의 형식이라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고대의 책봉체제에 부회하여 “백제가 이 칠지도를 왜의 군주에게 주었을 리가 만무한데 동진이 백제를 매개로 하여 왜왕에게 준 것으로 본다면 가능성이 생긴다”(칠지도 명문에 대한 일해석;1966)라 했다.

 

동진이 그 당시 백제를 도운 왜왕의 공로를 포상하여 백제로 하여금 전달케 했다는 말인데, 369년 당시 백제는 치양성에 쳐들어 온 고구려 군 2만을 격파하고, 371년에 평양성을 점령 고국원왕을 살육하던 (4세기 중 최대의 군사력과 영향력을 뿜어내던 可謂 무소불위의 시대였다. 일본 따위가 끼어들 틈이 없었던) 시대이었다. 또한 동진과 외교교섭이 이루어 진 것은 372년이다. 동아시아 책봉시스템을 인정하여, 책봉을 받는 경우에만 ‘세자’ 사용을 했다 하더라도, 백제가 遣使하여 책봉을 받기 전에 “세자”라는 용어를 쓰고, 또한 동진이 백제왕을 매개로 왜왕에게 주었다는 것이 과연 있을 수 있는 일인가? 라는 것이다.

 

다음은 재일 사학자 이진희 선생이 1975년 8월6일자 讀賣新聞에 쓴 칼럼을 인용한다.


다시금 七支刀 조사를 호소함
- 鈴木治의 논평에 붙여서 -

칠지도는 호태왕비문과 함께 일본 고대사나 4,5세기 일본열도와 한반도의 관계를 연구하는 데 있어 근본 사료로서 널리 그 이름이 알려져 있다. 이에 의해서 ‘대화조정’이 4세기 후반에 한국으로 진출하여 ‘임나일본부’를 두어 남한을 지배했다는 ‘사실’이 도출되고 그것이 중학교나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까지 등장하고 있다.


주지하듯이 비문에는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爲臣民, 以六年丙申王躬率水軍討利殘國軍”이라는 구절이 있고, 일본 학계에서는 이것을 “백제신라는 본디 속국으로서 유래 조공했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에 와서 바다를 건너 백제나 △△ (신)라를 치고 이로써 신민으로 삼았다”고 읽어, “以六年丙申 ---”을 따로 끊어버림과 동시에‘왜’를‘대화조정’이 파견한 군대라고 본다. 그렇다면 신묘년(391년)에 대화군대가 바다를 건너가서 백제나 신라를 정복하고 이를 지배한 것으로 된다.


석상신궁의 七支刀 명문에 보이는‘泰和’4년이라는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있어서는『일본서기』신공황후 52년조의‘七枝刀 獻上’기사와 결부시키기 위하여‘泰始’4년으로 읽고, 그 기년을 120년 끌어 내리자는 說이 유력하게 된 세계대전 이후에 있어서는‘泰和’4년으로 읽어 그것을 동진 太和 4년(369년)에 맞추는 福山說이 정설이 되었다.


그리고 칠지도는 369년에 만들어 3년 뒤인 372년(신공 52)에 헌상된 것으로 간주하고, 나아가 신공기 후반의 대 한국 관계 기사는 사실을 기초한 것으로 보았다. 이렇게 학계에서는『記 紀』기사 로서는 4세기 일본은 거의 알 수 없으나 ‘대화 조정’이 한국에 출병하여 지배한 것만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史實’의 뒷받침으로 이용된 호태왕비나 칠지도 연구에는 『記 紀』기사를 무비판적으로 사실로 보려고 하는 일본 근대사학의 왜곡된 체질이 반영되어 있다. 그러므로 나는 1972년에 호태왕비 연구에 숨어있는 왜곡됨을 밝혔으며(『廣開土王陵碑의 硏究』, 吉川弘文館), 이듬해 1973년에는 칠지도에도 커다란 의문이 있음을『好太王碑의 수수께끼』(講談社) 및『讀賣新聞』의「칠지도의 종합조사를」이라 題한 글에서 지적했다. 그리고 1974년 10월 칠지도 공개를 기회로 종합조사 하도록 제안했었다. 4,5세기 역사상을 좌우하는 근본 사료에 문제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을 분명히 하는 것이 학계의 초보적인 의무이기 때문이다.


내가 칠지도 종합조사를 제안한 것은, 그 연구사를 돌아보면 누구라도 곧 알 수 있는 일인데, 종래의 그것은 명문의 엄밀한 해독 해석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日本書紀』의 ‘獻上’ 기사를 사실로 꾸며내는 방향에서 행해졌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명문 일부가 깍였다든지 새로운 자획이 나타났다든지 하는 것이다. 연호를‘泰始’4년으로 하기 위해서‘泰和’의‘和’,‘五月十一日’의 ‘五’와 ‘一’의 자획을 일부 깍은 것이 菅政友였음은 주지의 사실이거니와, 국보지정(1953년) 후에도 괴이하게도 ‘十一日’이 十六日로 바꿔지고 있다. 더욱이 실물은 일반인에게는 공개되지 않았던 것이다.

1974년 10월 이것이 공개되었을 때 나는 비로소 실물을 볼 기회를 얻었는데, 그 때 사무소에 들러서 육안으로는 뚜렷하지 않으므로 정밀조사를 해야 한다는 것을 몇 사람 동석자가 있는 앞에서 궁사에게 이야기 하고, 그 뒤에도 각 방면에 운동하고 있다.

그런데 지난 1975년 7월 21일자 본지에 鈴木治(天理大學 교수)가 「일한고대사의 수수께끼」라 제한 글을 실어 나의 견해를 전면적으로 비판했다.

鈴木은 우선 작년의 칠지도 공개에 언급하여ㅡ “당시의 신문에 의하면 --- 이진희도 관람자의 한 사람인데, 이 명문을 보고 명치 초년에 --- 관정우가 2,3 문자를 일부러 깍아 버린 흔적이 역연하게 시인된다고 말했다고 한다”고 쓰는 동시에, “정우가 이 칼을 일본서기 신공 섭정 52년(372년)에 백제로부터 헌상된 칠지도로 고정하기 위해서라면 혹 깍을 필요가 있었을 것이지만 그는 전적으로 독자적인 생각에서 68년설을 제창한 것이므로 그럴 필요는 전혀 없다”고 하고, “李씨(이진희)의 발언은 사사로운 억측에 지나지 않는다”고 몰아붙이고 있다. 그리고 명치 초기까지는 田植祭(역주 : 모내기를 기념한 축제) 때 “신관이 마상에서 이 칼을 악령을 내몰기 위해 휘두르면서 나아간” 것이므로, 상감 문자에 상처가 생기는 것은 하등 이상하지 않다“고 단언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 명백한 것처럼 鈴木은 나의 논문이나 저서가 아니라 ‘당시의 신문’ 기사에 기초하여 논평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의 논설을 문제로 삼을 때에는 엄밀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근본사료에 손을 대었다고 한다면 종래의 연구가 어떻한 것이었는지를 점검하는 데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데, 그는 명문의 일부가 깎여진 사실조차 부정한다. 하지만 정설로서 인정받고 있는 福山의 논문에서도 ‘泰和’의 ‘和’자는 “小刀와 같은 것으로 몇 번이나 깎아보려고 한 듯하다”고 지적하고 있고, 1950년에 精査한 榧本杜人은, “지금까지 거의 銘字를 확실히 하기 위해 입혀진 상처인 듯이 말해져 왔으나 --- ‘泰和’의 ‘和’처럼 銘字를 지우려고 한 削傷(삭상:깎은 상처)도 있다. 이제까지 판명된 것을 든다면 ‘侯王’의 王, ‘百濟王世△(子)’의 王과 지금까지 子로 읽어 온 銘字, ‘傳示倭世’의 倭(또는 後)일까라고 읽어 오던 명자인 듯한데 ---”(「七支刀銘文再考」『朝鮮學報』제49집, 1968)라고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학보』는 령목이 교편을 잡고 있는 천리대학의 본부를 둔 학술지이다. 이렇게 본다면 령목은 ‘정설’이 된 논문이나 가까이에 있는 책조차 읽지 않고 제멋대로의 억측에 기초하여 논평하고 있는 셈이다. “사사로운 억측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말은 이러한 조잡한 의론을 두고 해야 할 말인 것이다. 칠지도에 관한 기타의 문제나 호태왕비 문제에 대해서도 반론할 가치가 없을 정도로 조잡한 의론이라고 결론짓는 바이지만, 필요하다면 또 쓰겠다.

오늘날 ‘정설’로서 널리 인정받고 있는 복산설도 앞서 실은 신문에서도 지적했듯이 명치 시대 이래의 泰始 泰初설과 마찬가지로 일본서기 신공기 기사를 근거로 하여 칠지도를 해석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한편 栗原朋信(早稻田大學 교수)은 책봉체제론을 갖고서 신공 52년조의 ‘칠지도 헌상’은 사실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명문의 ‘聖音’을 ‘聖晋’으로 볼 근거는 박약하며 백제가 369년이나 그 이전에 동진의 책봉을 받았다고 보는 것도 사실에 반하는 의론이다.

나는 百濟大王이 侯王으로 간주하는 河內 지방 백제계 渡來人 수장에게 하사하기 위하여 480년에 만든 것으로 보고 있다. 왜냐하면 北魏 太和 4년(480년)은 5월11일이 병오일로서 칠지도 명문과 일치할 뿐 아니라 백제에서 ‘大王’과 ‘侯王’ 제도가 등장하는 것도 5세기 후반의 일이기 때문이다.(편집자주 : 남제서 등 기록의 동성왕대 대륙경략 기사와 관계된 것인 듯)

좌우간 칠지도 명문에는 아직 의문이 남아 있는 箇所가 많다. 명문의 사실 확정이 사료 다툼의 기본이므로 그것을 명확히 하는 것이 학계의 의무인 것이다. 칠지도가 일본 고대사뿐 아니라 한국 고대사도 크게 규제하는 근본사료인 만큼 한국 연구자도 끼워서 종합조사를 하는 것이 일본 학계가 해야 할 국제적 儀禮가 아닐까. 다시 말하거니와 이러한 가장 기본적인 과제를 소홀히 해놓고 이렇쿵 저러쿵하는 것은 의론의 회피가 된다고 나는 생각하는 바이다.

(이상 이진희 칼럼 끝)

 


1970년대 이후 일본학계의 동향


藤間生大는 「현재에 있어 사상상황의 과제로서 - 김석형저 『고대조일관계사』에 대하여 - 」(『역사학연구』1970년) 중에서

분국설을 비판하면서도 칠지도에 대하여, “백제가 왜에 종속하고 있었음이 증명되지 않을뿐더러 실질 이상의 표현이지만 도리어 백제왕의 왜왕에 대한 높은 自負의 정도를 보여주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칠지도, 호태왕비문은 물론이고 『송서』일본전의 기사조차도 5세기 왜의 조선(한반도)에 대한 지배력이 강한 것이었음을 증명해주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井上秀雄은「임나일본부의 행정조직」(『일본서기연구』2,1966 ;『임나일본부와 왜』1973)에서

“‘임나일본부’는 야마토 정권에 의한 한국지배의 거점이 아니라 단순한 在地세력의 연합체와 같은 것”이라며, 야마토 정권과 왜는 종래 일체의 것이라고 간주되어 왔으나 별개의 정치세력이라 하였다.

 

1977년 이후는 일본에 있어서의 ‘임나일본부설’ 및 일본국가 기원에 대한 견해가 크게 바뀌는 계기가 되었던 해이다.

 

우선 山尾幸久는 『日本國家의 形成』(岩波新書,1977)에서

신공 46년조에서 52년조에 이르는 일련의 기사는 干支 2運이 아니라 3運(180년)을 끌어 내려야 조리에 맞음을 밝혀내고, 왜 왕권에 의한 한국지배는 생각되지 않는다는 것을 논증했다.

또 국가형성 시기는 6세기 중엽(欽明期) 이후이며 그 국가형성의 사회사적 분기점(?)은 5세기 후반에 시작되는 南韓(편집:백제 가라 등 남부세력이라 봄)으로부터의 정치집단의 도래라고 하였다.

 

1979년의 ‘국가 성립의 수수께끼’라는 심포지엄에서 일본의 대표적인 학자인 井上光貞, 直木孝次郞, 西嶋定生, 大塚初重, 森浩一 등은

일본 국가의 성립시기를 6세기 후반으로 주장(森浩一는 7세기 후반설 주장)했다. 종래 일본 내에서 통설로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던 4세기 중엽설이 한꺼번에 2백년이나 내려간 것이다. 이는 고대 일본의 역사를 근본에서부터 재조립하는 것을 뜻하는 커다란 ‘사건’ 임을 의미한다.       

 

국내의 동향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국내의 본격적인 비판으로는 천관우의 학설을 들 수 있는데, 그의 글(「한국사의 조류」6· 7· 8『신동아』1972년 12월~1973년 2월 및 「복원 가야사」『문학과 지성』29,1977년)에서

소위 임나일본부라는 것은 4세기 후반에서 6세기 초에 걸쳐 가야지방을 지배하기 위해 설치된 백제의 파견군사령부와 같은 것으로 보고,


신공 49년(369년)조에 왜병이 수행한 것처럼 되어있는 신라 및 남가라(본가야) 등 낙동강 유역 7국 평정기사를 백제 근초고왕 父子의 작전을 기록한 것으로 보고, 그 ‘임나일본부’가 5,6세기에 들어와 그 중심을 때때로 이동한 것이라 했다.

 

북한 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 손영종은 <「광개토왕릉비문 연구」사회과학원,1998년(1985년 - 1988년 연구실적)>도서출판 중심의 북한의 우리 역사 연구 알기 3편(2001년 5월)의 책에서,

“4 - 5세기 백제왕과 왜왕 사이의 종속적 관계를 가장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유명한 백제 칠지도이다.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칠지도에서는 백제왕이 후왕인 왜왕에게 이 칼을 내려 보내준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제반 력사적 사실은 북규슈 일대의 왜가 백제의 조종 밑에 움직이던 친백제, 친가야적 존재였다는 것을 말하여준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북규슈 일대의 왜는 4세기말 - 5세기 초에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면서도 백제의 조종에 따라 고구려, 신라와의 전쟁에 참가하게 되었던 것이다.(책79p)”라 하여 당시의 일본의 성격에 대하여 백제의 조종 밑에 있는 북규슈 이또지마 반도 일대의 왜왕국으로 보고, 일본에서 주장하는 소위 기내지방의 통일된 大和倭(야마토 정권)라는 주장을 일축했다.

 

<편집자 주 : 이 글은 이진희선생의 논문을 바탕으로, 관련서적 몇권에서 중요부분을 요약 인용한 글입니다.>

(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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