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三国史記(三国史記)》
韓国で 一番体系的に ‘倭王’が言及される四書です.
主に新羅・百済と倭の関係の中で登場して, なぜを “蛮夷”や “敵国”で認識する傾向が強いです.
代表記録
新羅本紀ジズングワング 4年 (503年)
「倭王が使臣を送って金 30量, 仮に 100匹を捧げた.」
→ 当時なぜが新羅に 朝貢または外交謝絶を派遣一記録.
真興王 14年 (553年)
「倭王が使臣を送って表文と物産を捧げた.」
→ 外交関係が存在したし, なぜが新羅を ‘上位国’のように待偶したように見える.
真平王 39年 (617年)
「倭王が使臣を送って朝貢こんにちはだった.」
→ 中国四書のように, 倭王が ‘朝貢型外交’をする姿が繰り返される.
百済本紀近肖古王 27年 (372年)
「倭王が使臣を送って朝貢こんにちはだった.」
→ 百済と倭の同盟がこの時期に活発だったことを反映.
分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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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国史記》は 中国式外交秩序認識に付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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倭王は ‘王(王)’に呼称されるが, 対等な君主に見な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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百済・新羅と 外交または貿易・軍事同盟の相手で登場.
2. 《三国有史(三国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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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国有史》は 《三国史記》より後代(高麗忠烈王の時一然著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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なぜに対する言及は走路 仏教伝来や神話的事件と連関されて現われる.
例示:
“阿度和尚が倭国に不法を伝えた.”
→ 倭国(倭国)は 不法(仏法)を伝授受ける対象,
すなわち文化的に新羅より下の段階で描写.
3. 《高麗史(高麗史)》
高麗時代にも日本との外交文書で “倭王(倭王)”という表現が使われる.
例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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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史セガ文宗 9年(1055年)
「倭王が使臣を送って表文を捧げた.」
→ 日本が高麗に朝貢形式の外交を酔う. -
恭愍王 20年(1371年)
「倭王がまた使臣を送って朝貢を捧げた.」
→ 倭寇(倭寇) 侵入が多かったが, 同時に外交関係も維持.
意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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煮こもうとする ‘倭王’を明確に ‘外国の君主’で認識するが,
相変らず 朝貢関係の下側相手で技術. -
中国の ‘冊封秩序’をそのまま受け継いだ表現.
4. 《朝鮮王朝実録(朝鮮王朝実録)》
朝鮮時代には “倭王(倭王)”が非常によく登場します.
朝鮮は日本の治者を終りまで ‘王’だけで歌って,
‘国王(国王)’や ‘天皇(天皇)’と称しなかったです.
主要例示
太宗実録 3年 (1403年)
「倭王が朝鮮に表文を送って朝貢こんにちはだった.」
→ 足利ヨシミツ(足利義満, 室町幕府 3台将軍) 時代.
明から ‘日本国王’ 称号を受けたが,
朝鮮は相変らず ‘倭王’と呼んだ.
世宗実録 25年 (1443年)
「倭王が通信社を行かせて歳遣船(歳遣船)を請じた.」
→ 機内(紀内)の倭王が朝鮮に交易許可を要請.
世宗が ‘聖亥約條’(1443) を通じて交易制限許容.
先祖実録 (壬辰の乱時期)
「倭王プングシンスギル(豊臣秀吉)が書信を送って...」
朝鮮は豊臣秀吉を ‘倭王’で銘記.
人造実録
「倭王が使臣を送って和親を請じた.」
江戸幕府徳川家康, イエミスの時の外交記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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その誰も天子と呼ぶのも認めなさ ww
🏺 1. 《삼국사기(三國史記)》
한국에서 가장 체계적으로 ‘왜왕’이 언급되는 사서입니다.
주로 신라·백제와 왜의 관계 속에서 등장하며, 왜를 “오랑캐”나 “적국”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 대표 기록
◼ 신라본기 지증왕 4년 (503년)
「왜왕이 사신을 보내어 금 30량, 비단 100필을 바쳤다.」
→ 당시 왜가 신라에 조공 또는 외교 사절을 파견한 기록.
◼ 진흥왕 14년 (553년)
「왜왕이 사신을 보내어 표문과 토산물을 바쳤다.」
→ 외교 관계가 존재했으며, 왜가 신라를 ‘상위국’처럼 대우한 듯 보임.
◼ 진평왕 39년 (617년)
「왜왕이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 중국 사서에서처럼, 왜왕이 ‘조공형 외교’를 하는 모습이 반복됨.
◼ 백제본기 근초고왕 27년 (372년)
「왜왕이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 백제와 왜의 동맹이 이 시기에 활발했음을 반영.
🗝️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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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는 중국식 외교질서 인식을 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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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왕은 ‘왕(王)’으로 호칭되지만, 대등한 군주로 보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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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신라와 외교 또는 무역·군사 동맹의 상대로 등장.
📜 2. 《삼국유사(三國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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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는 《삼국사기》보다 후대(고려 충렬왕 때 일연 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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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에 대한 언급은 주로 불교 전래나 신화적 사건과 연관되어 나타남.
예시:
“아도화상이 일본에 불법을 전하였다.”
→ 일본(倭國)은 불법(佛法)을 전수받는 대상,
즉 문화적으로 신라보다 아래 단계로 묘사.
🏯 3. 《고려사(高麗史)》
고려 시대에도 일본과의 외교 문서에서 “왜왕(倭王)”이라는 표현이 사용됨.
예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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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세가 문종 9년(1055년)
「왜왕이 사신을 보내어 표문을 바쳤다.」
→ 일본이 고려에 조공 형식의 외교를 취함. -
공민왕 20년(1371년)
「왜왕이 다시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다.」
→ 일본인(倭寇) 침입이 많았지만, 동시에 외교 관계도 유지.
🗝️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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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는 ‘왜왕’을 명확히 ‘외국의 군주’로 인식하되,
여전히 조공 관계의 아래쪽 상대로 기술. -
중국의 ‘책봉질서’를 그대로 계승한 표현.
🏰 4.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조선 시대에는 “왜왕(倭王)”이 매우 자주 등장합니다.
조선은 일본의 통치자를 끝까지 ‘왕’으로만 부르고,
‘국왕(國王)’이나 ‘천황(天皇)’이라 칭하지 않았습니다.
📘 주요 예시
◼ 태종실록 3년 (1403년)
「왜왕이 조선에 표문을 보내 조공하였다.」
→ 아시카가 요시미츠(足利義滿, 무로마치 막부 3대 쇼군) 시절.
명나라로부터 ‘일본국왕’ 칭호를 받았으나,
조선은 여전히 ‘왜왕’이라 불렀다.
◼ 세종실록 25년 (1443년)
「왜왕이 통신사를 보내어 세견선(歲遣船)을 청하였다.」
→ 기내(紀內)의 왜왕이 조선에 교역 허가를 요청.
세종이 ‘계해약조’(1443) 를 통해 교역 제한 허용.
◼ 선조실록 (임진왜란 시기)
「왜왕 풍신수길(豊臣秀吉)이 서신을 보내어...」
조선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왜왕’으로 명기.
◼ 인조실록
「왜왕이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였다.」
에도 막부 도쿠가와 이에야스, 이에미쓰 때의 외교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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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누구도 천자라고 부르지도 인정하지도 않음 ww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