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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国の味 - コムタンスープ(全羅道, ソウル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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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羅州. 普通地名あげく州(州)が付くということはその所が過去に地方行政の中心だったということを言ってくれる. 全羅道という名前も前週と羅州が中心地だから生じたのだ. 慶尚道は慶州, 常住があって忠清道は忠州, 清州があるように.

 今の出てくれる人口 10万がまだできない小さな都市だが朝鮮時代の羅州性はソウルのように四大門を取り揃えて東軒と客舎を取り揃えた行政の中心地だった. そして 肥えたナジュ平野で 豊かな 農産物を得ることができたし栄山浦の波路に沿って西南海のあらゆる物産が集結する豊かな故障だった.

 

 海と地のあらゆる物産が集結する所なので羅州市場も 人々に混んだ. 今もこの前だけできないが今も市場が立つ 4日と 9日には活気があふれる. このように行政の中心地として多くの受領が経て行った由緒のある地元にしよう周辺村の多くの人々が集まって来る活気に満ちたゴザングイオッドン位その歴史の中で大様な両班文化と活気に満ちた庶民文化がお互いに一団となりながら繁栄して来た所だ.

 昔の官庁と市場が会う所にコムタンスープ路地がある. 古くから模様は前週, 味はあってくれなさいという話があるほどに羅州コムタンスープは深い味を誇る.

 羅州人々は市場ではなければコムタンスープ店にイッナする気がするほどに お昼になったコムタンスープ集は人々ににぎやかだ. ナイマンイ召し上がった方も, 若い人も, 市価はママ手 つかまえて来た子供も熱い 延期がモラックモラックナはコムタンスープ器をおいしく留守にしている. 他の国者だけでなく羅州人たちも鍋ごと持って来てコムタンスープを私邸期もする.

 羅州コムタンスープは地域色が強く付け出す. 派手で味付けが濃い全羅道らしく黄色いたまご焼きをあげてごまと唐辛子粉を振り掛け出す. 他のコムタンスープとは違うように上に高名をあげておしゃれをした姿は 朝鮮時代ヤングバンがで食べた食べ物のように大様で気品あったように見える. そしておつゆの色は顔が映るほどに透明で清い. 六字排気のジルポンハムのように味がのんべんだらりと座りこんでいながらもさっぱりして香ばしい.

 羅州コムタンスープ味の秘密はまず牛の脚の骨である四骨でおつゆを作るのにある. 四骨とともに脊筋もおつゆ味に一役する. 四骨でおつゆをがっくり巻き上げるのにさっぱりする味がして小骨はさっぱりする味をつけると言う. ソルロンタンは骨で染み出る味ならコムタンスープは肉で染み出る味だ.

 羅州コムタンスープはヤジモリと事態, くびの肉が味の源泉だ. 20年間 置いて 苦みのする看守が抜けた 天日塩は深くてさっぱりする味をつける同時にこの家お婆さんの歴史を反映している. そしてギダリムの歳月が味を加えれば肉水色が濃くなって搖れを打つ.

 他のコムタンスープと同じく肉を引き上げ出す. 肉がしんなりとするように半日を冷やす間上に浮び上がる油をいちいち取り除ける手数が必要だ. 油が多ければおつゆが脂っこくてさっぱりする味もしない. 取り除けた油は化粧品会社で持って行くと言う.

 羅州コムタンスープの上げた肉も他の地域と確実に差がある. 内臓や雑肉が全然 まじない赤身をさくりさくりと切って厚くてふんだんだ. 豊かな羅州人の性分が現われる. 

 羅州コムタンスープは肉がすべて冷えればすぐトリョムしないで初めて沸かした肉水に入れてもう一度じっくり煮こみ出す. それでこそおつゆはますます透明になって柔らかくて香ばしい羅州コムタンスープ固有した味がすると言う. また 2時間半意待つことを加えてご飯と肉を器に入れてトリョムしてトッベギに盛り出せば慶尚道のヒョンプングシックコムタンスープとは違う羅州式コムタンスープになる. 

 数十年目行き付けである年寄りたちはその味を忘れることができなくて毎度尋ねて来るのにその方たちに羅州コムタンスープの歴史をかんで見る. 羅州とその周辺で集まって来る人々が好んで食べた地方食べ物だった羅州コムタンスープが知られるようになった時は 60年代以後経済開発が加速化されてからだ. 湖南, 南海高速度でが開通してナソブトで交通が便利になって観光文化が形成されながら 70年代後半に全国的に知られ始めたと言う.

 

 そしてもうちょっとさかのぼればコムタンスープ一杯には悲しい歴史の盛られた息は話がある. 日帝時代に羅州に日本人たちが缶詰め工場を建てた. そして 日中戦争の時の兵站品で牛肉, 豚肉 缶詰めを作って供給したが自ずから蘇我羅州で流れこむようになって缶詰めをし終わることは骨と内臓は自ずから朝鮮人が食べるようになりながらたとえ少義副産物だが これをコムタンスープにも使うようになりながら羅州のコムタンスープ文化はもっと深く根付くようになる.

このように歴史の中で人間が 生を引き続くためにした 熾烈な闘いの跡は 文化になってまたつながって再創造される.  

 農耕社会で一番大事な財産だった牛. そうだからコムタンスープは両班たちもよく食べ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補身食べ物だ. しかし誰も好きな食べ物だったし身を補身するために朝鮮両班たちはたびたびコムタンスープを楽しんだ. これらが食べたコムタンスープは 唐辛子粉や千切にしたなが葱, 塩を全然使わなかった. の間も朝鮮醤油で合わせたし清いおつゆを好んだ.

 しかし庶民たちに牛肉は 高根の花だった. それで庶民たちは両班たちが食べない牛の骨を利用してソルロンタンで食べることができた.

 朝鮮時代王は先農壇で農業を勧奨して豊作を祈った祭祀である先農祭を執り行なって 直接畑を耕す親敬意式を 行った. 儀式を終えれば 民を慰めるために儀礼後残った肉と牛の骨を煮こんで沸かして分けてやったがこれがソルロンタンだ.

 ソルロンタンは庶民たちが簡単にさっさと荒くご飯に湯をかけたお汁であることだ. 口当たりによって辛い唐辛子粉やニンニクなどを思う存分入れて食べた. どこにでも大きい釜かけておつゆ煮こんでご飯に湯をかけた.

 

 

 

 しかし伝統あるヤングバンがではソルロンタンを遠ざけた. 味はあるが下層階層たちが作った食べ物だと思った. しかし直接ソルロンタン家に行く事はできないが人知れず配達させて食べた両班たちが多い位にソルロンタンの味は人気あった. そうするうちに徐徐にソルロンタンは世代と地位高廈を問わず国民の好んで食べる食べ物になった. 余暇文化が発達す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数十年の前だけでも冷麺やソルロンタンに外食することが一般的なコースだった. キム・ヨンサム大統領集権の時も青瓦台でカルグッスと一緒にソルロンタンを食べる姿をよく TVで見られた.

 ソルロンタンが生まれたソウルでコムタンスープを会ってみる. ソウルにはソルロンタンすればネノ−ラする家が多いがコムタンスープすれば断然こちら, 誰でもチォッソンに指折るソウルコムタンスープの至尊がある. その所は明洞に位した河東官だ.

 歴代大統領たちが好んで食べたと言うのに特に朴正煕大統領はこの家コムタンスープが好きで青瓦台に配達させて食べたりしたし済州島を現場訪問した時もヘリに空手したりしたと言う.

 またこの家が有名なことは早く門を閉めたからなのにその日割位だけ準備してすべて八面門を閉めたと言う. 12時半に門を閉める時もあったと言うのに今も盛んに営業する時間の 4時半なら間違いなく門を閉めて翌日の営業を準備する.

 食事時間がずっと経ったのに食堂の中は一杯だ. 若い人々もたくさん尋ねるが古い行き付けたちもずっと捜す. こちらでは 10年になった行き付けは名刺も出す事ができない. 食卓も古くて器も古風である真鍮器に渡す. 真鍮器は管理するのが気難しい方なのに今は機械にするがこの前には稲のわらに瓦を碎いたパウダーをつけて来た家族と従業員たちが顔が映るほどにすべすべするように磨いたと言う.

 

 河東官のコムタンスープはおつゆが羅州コムタンスープのように清くて透明だ. この清くて透明中に凉しくてきれいで深い味がひそんでいる. 今人々は肉特有のにおいが嫌だが昔の人々は肉においが好きだったし肉おつゆの油をのどの時をはがすと飲んだりした. 河東官のちょっと肉においがしながらも適当に油っこい味は 昔のソウル両班たちの好んで食べたソウル式コムタンスープの原型を見るようだ.  

 キッチンの底は油が染みこんですべすべだ. その日その日磨いても毎日毎日油仕事をするから生じたのだ. この家のお婆さんは ソウルブックチォンが両班出身の姑に受け継いだ腕前で昔の両班集の清くて淡泊なコムタンスープ味を引き続いている. 

 河東官コムタンスープに入って行くコッチャンと大腸は特別なおつゆ味を出す. も肉質が柔らかくて, 告訴して, 本当に肉おつゆ味をつけることができるヤジモリ, 事態, チァドルベギをすべて等しく使って, タングバブはそのままご飯を巻いてはよくかまなくて消化のうまくできない数があるから, 必ず乾かした殖やしたご飯を暖かくトリョムしてお客さんお膳に出す.

 

 

 

 ソウル式コムタンスープの上げた肉はこぎれいに陽地獣肉と 内臓だけだ. 数十年の間まな板の上で踊ってから擦れて消えた刀は数え切れない位に毎日毎日多くの羊の肉を切る. 堅い鉄も 2年しかならない時間の間こんなに擦れた.

 肉によって切る部屋食餌他の内臓の場合は斜めに切って陽地はきちんと垂直で切る. 両班集では肉を何番(回)かまなくても良いだけ薄く切り出して部位別でいちいち選んできちんとご飯の上に上げる. 肉水をトリョムしてトッベギではない真鍮器に盛ったら両班加衣コムタンスープ姿そのままだ. その昔たまに一度ずつ食べた深くて香ばしい味を思い浮かんで年寄りたちは数十年の間コムタンスープを食べて思い出を何度もじっくり考える.

 お婆さんは一日もおかないでカクテギを盛る. コムタンスープやソルロンタンには違う すごいおかずが必要なしにおいしいカクテギさえあれば万事 OKなのにコムタンスープやソルロンタンがおいしい家にしてカクテギのまずい家がほとんどない. コムタンスープがおいしくてもカクテギがまずければがっかりするようになるほどにカクテギはコムタンスープを食べるのに非常に重要だ. こちらのカクテギは蛇足ないソウル式なのにソウル式カクテギは他の塩辛を入れないであみの塩辛一つだけ入れて凉しくてこぎれいな味が特徴だ.

 毎日カクテギを盛る理由もこの家コムタンスープ味にカクテギが非常に重要だからだ.  おつゆが重たくて濃いコムタンスープとやや酸っぱくよく熟れたカクテギは幻想の相性を見せる. コムタンスープ味を楽しんでここにカクテギおつゆを入れて飲んだら優に芸術だから割ばかりする. 歳月が変わりながら人々は両班たちのコムタンスープを自分たちの口に合うように変えてコムタンスープを身分の区別がない庶民の食べ物で作った.


 行き付けが多い位この家でばかり通じる言語があるのにまずカクテギおつゆはカックグックだと言う. 従業員にカックグックをくれと言えばやかんにいっぱい盛られたカクテギおつゆを趣向どおり注いでくれる. カクテギおつゆはちょっと脂っこいかも知れないおつゆをさっぱりしてくれる. 

 また生卵を売るのにこれをコムタンスープの中で入れれば水炊きコムタンスープになる. 卵がコムタンスープの中に入ればニワトリ一匹になるのだ. 夢より夢合せが良い. 昔には栄養が不足だったからどこにでも卵一つさえ入れれば栄養満点の心強い食べ物になったりした.

 この家には呼び次第に価格と量を調節して食べることができるし肉も内臓多く, 陽地たくさんすればお客さん趣向どおり油量までも調節して作ってくれる. そして冷や水一杯くれと言えば大きいコップに焼酒を盛ってくれるのに焼酒を冷や水だと言うことがおもしろい.

 コムタンスープを作る人はばか正直な性分がコムタンスープとそっくり似ている. 人生を楽しむよりコムタンスープ一つを眺めて最高のコムタンスープを作るために数十年間骨を埋めて一杯の中にしゅうと精神を盛り込んだ. その味は代代孫孫つながって記憶の中に刻印された味になってその味は文化になった.

 韓国文化だと呼ぶ大きな壁はこれらが作っておいた煙瓦一枚が集まって成り立ったことで大きな碧桃小さな煙瓦たちがなくては成り立つことができないものだ.

 行商人の道によって伝わって伝わった味, 両班と庶民の身分高廈を問わずハンソッに一団となった香ばしくて濃い味, キョキョイ積もった歳月によって加わって加わった味. コムタンスープの濃い味と誠実な人を得るために長年の時間真心を注ぐお母さんの心は今も相変わらずもっと濃く染み出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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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맛 - 곰탕(전라도, 서울 편)

 나주. 보통 지명 끝에 주(州)가 붙는다는 것은 그곳이 과거에 지방 행정의 중심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전라도라는 이름도 전주와 나주가 중심지였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경상도는 경주, 상주가 있고 충청도는 충주, 청주가 있듯이.

 지금의 나주는 인구 10만이 채 안 되는 작은 도시이지만 조선시대의 나주성은 서울처럼 사대문을 갖추고 동헌과 객사를 갖춘 행정의 중심지였다. 그리고 비옥한 나주평야에서 풍부한 농산물을 얻을 수 있었고 영산포의 뱃길을 따라 서남해의 온갖 물산이 집결하는 풍족한 고장이었다.

 

 바다와 땅의 온갖 물산이 집결하는 곳이다보니 나주 장터도 사람들로 붐볐다. 지금도 예전만 못 하지만 지금도 장터가 서는 4일과 9일에는 활기가 넘친다. 이렇듯 행정의 중심지로서 여러 수령이 거쳐간 유서깊은 고장이자 주변 고을의 여러 사람들이 모여드는 활기찬 고장이었던만큼 그 역사 속에서 점잖은 양반문화와 활기찬 서민문화가 서로 어우러지며 번영해온 곳이다.

 옛 관청과 시장이 만나는 곳에 곰탕 골목이 있다. 옛부터 모양은 전주, 맛은 나주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나주곰탕은 깊은 맛을 자랑한다.

 나주 사람들은 장터 아니면 곰탕 가게에 있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점심이 된 곰탕집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나이많이 드신 분도, 젊은 사람도, 시장가는 엄마 손 붙잡고 온 아이도 뜨거운 연기가 모락모락나는 곰탕그릇을 맛있게 비우고 있다. 다른 지방사람 뿐만 아니라 나주사람들도 냄비째 들고와서 곰탕을 사가기도 한다.

 나주곰탕은 지역색이 강하게 묻어난다. 화려하고 양념이 진한 전라도답게 노란 달걀지단을 올리고 깨와 고춧가루를 뿌려낸다. 다른 곰탕과는 다르게 위에 고명을 올려 멋을 낸 모습은 조선시대 양반가에서 먹던 음식처럼 점잖고 기품있어 보인다. 그리고 국물의 색은 얼굴이 비칠 정도로 투명하고 맑다. 육자배기의 질펀함처럼 맛이 질펀하면서도 시원하고 구수하다.

 나주곰탕 맛의 비밀은 우선 소의 다리뼈인 사골로 국물을 내는데 있다. 사골과 함께 등뼈도 국물맛에 한몫한다. 사골로 국물을 푹 우려내는데 시원한 맛이 나고 잔뼈는 개운한 맛을 낸다고 한다. 설렁탕은 뼈에서 우러나는 맛이라면 곰탕은 고기에서 우러나는 맛이다.

 나주곰탕은 양지머리와 사태, 목살이 맛의 원천이다. 20년동안 두어 쓴맛이 나는 간수가 빠진 천일염은 깊고 개운한 맛을 내는 동시에 이 집 할머니의 역사를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기다림의 세월이 맛을 더하면 육수색이 짙어지며 요동을 친다.

 다른 곰탕과 마찬가지로 고기를 건져낸다. 고기가 야들야들해지도록 반나절을 식히는 동안 위로 떠오르는 기름을 일일이 걷어내는 수고가 필요하다. 기름이 많으면 국물이 느끼하고 시원한 맛도 나지 않는다. 걷어낸 기름은 화장품 회사에서 가져간다고 한다.

 나주곰탕의 얹은 고기도 다른 지역과 확연히 차이가 난다. 내장이나 잡고기가 전혀 섞이지 않은 살코기를 뭉텅뭉텅 썰어 두껍고 푸짐하다. 풍요로운 나주사람의 성품이 드러난다. 

 나주곰탕은 고기가 다 식으면 바로 토렴하지 않고 처음 끓인 육수에 넣고 다시 한번 푹 고아낸다. 그래야 국물은 점점 투명해지고 부드럽고 구수한 나주곰탕 고유한 맛이 난단다. 다시 2시간 반의 기다림을 더해 밥과 고기를 그릇에 넣고 토렴하여 뚝배기에 담아내면 경상도의 현풍식 곰탕과는 다른 나주식 곰탕이 된다. 

 수십년째 단골인 어르신들은 그 맛을 잊지 못해 매번 찾아오는데 그분들에게 나주곰탕의 역사를 물어본다. 나주와 그 주변에서 모여드는 사람들이 즐겨먹은 지방음식이었던 나주곰탕이 알려지게 된 때는 60년대 이후 경제개발이 가속화되면서부터이다. 호남, 남해고속도로가 개통되고 나서부터로 교통이 편리해지고 관광문화가 형성되면서 70년대 후반에 전국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곰탕 한 그릇에는 슬픈 역사가 담긴 숨은 이야기가 있다. 일제시대에 나주에 일본인들이 통조림 공장을 세웠다. 그리고 중일전쟁 때 군수품으로 쇠고기, 돼지고기 통조림을 만들어 공급하였는데 자연히 소가 나주로 흘러들게 되고 통조림을 하고 남은 뼈와 내장은 자연히 조선인이 먹게 되면서 비록 소의 부산물이지만 이것을 곰탕에도 사용하게 되면서 나주의 곰탕문화는 더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된다.

이렇듯 역사 속에서 인간이 삶을 이어가기 위해 벌였던 치열한 투쟁의 흔적은 문화가 되어 다시 이어지고 재창조된다.  

 농경사회에서 가장 소중한 재산이었던 소. 그렇기 때문에 곰탕은 양반들도 흔히 먹지 못 했던 보신음식이었다. 하지만 누구나 좋아하는 음식이었고 몸을 보신하기 위해 조선 양반들은 종종 곰탕을 즐겼다. 이들이 먹던 곰탕은 고춧가루나 채 썬 파, 소금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간도 조선간장으로 맞췄고 맑은 국물을 선호했다.

 하지만 서민들에게 쇠고기는 그림의 떡이었다. 그래서 서민들은 양반들이 먹지 않는 소의 뼈를 이용해 설렁탕으로 먹을 수 있었다.

 조선시대 왕은 선농단에서 농사를 권장하고 풍작을 기원하던 제사인 선농제를 지내고 직접 밭을 가는 친경의식을 행하였다. 의식을 마치면 백성을 위로하기 위해 의례 후 남은 고기와 소의 뼈를 고아 끓여 나누어 주었는데 이것이 설렁탕이다.

 설렁탕은 서민들이 간단하게 뚝딱 거칠게 밥을 말아 먹었던 장국인 것이다. 입맛에 따라 매운 고춧가루나 마늘 등을 맘껏 넣어 먹었다. 아무데서나 큰 솥 걸고 국물 고아서 밥을 말아 먹었다.

 

 

 

 하지만 전통있는 양반가에선 설렁탕을 멀리 했다. 맛은 있지만 하층 계층들이 만든 음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설렁탕 집에 가지는 못하지만 남몰래 배달시켜 먹었던 양반들이 많을 정도로 설렁탕의 맛은 인기있었다. 그러다가 점차 설렁탕은 세대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국민들이 즐겨먹는 음식이 되었다. 여가문화가 발달하지 못 했던 수십년 전만 해도 냉면이나 설렁탕으로 외식하는 것이 일반적인 코스였다. 김영삼 대통령 집권 때도 청와대에서 칼국수와 함께 설렁탕을 먹는 모습을 자주 TV로 볼 수 있었다.

 설렁탕이 태어난 서울에서 곰탕을 만나본다. 서울에는 설렁탕 하면 내노라하는 집이 많지만 곰탕 하면 단연 이곳, 누구라도 첫손에 꼽는 서울 곰탕의 지존이 있다. 그곳은 명동에 위치한 하동관이다.

 역대 대통령들이 즐겨먹었다고 하는데 특히 박정희 대통령은 이 집 곰탕을 좋아해 청와대로 배달시켜 먹기도 했고 제주도를 현장 방문했을 때도 헬기로 공수하기도 했다고 한다.

 또 이 집이 유명한 것은 일찍 문을 닫았기 때문인데 그 날 할만큼만 준비하여 다 팔면 문을 닫았다고 한다. 12시 반에 문 닫을 때도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도 한창 영업할 시간인 4시 반이면 어김없이 문을 닫고 다음날의 영업을 준비한다.

 식사시간이 훨씬 지났는데도 식당 안은 가득하다. 젊은 사람들도 많이 찾지만 오래된 단골들도 계속 찾는다. 이곳에서는 10년 된 단골은 명함도 못 내민다. 식탁도 낡고 그릇도 고풍스러운 놋그릇에 내어준다. 놋그릇은 관리하기가 까다로운 편인데 지금은 기계로 하지만 예전에는 볏짚에 기와를 빻은 가루를 묻혀 온 가족과 종업원들이 얼굴이 비칠 정도로 반질반질하게 닦았다고 한다.

 

 하동관의 곰탕은 국물이 나주곰탕처럼 맑고 투명하다. 이 맑고 투명함 속에 시원하고 깨끗하고 깊은 맛이 숨어있다. 지금 사람들은 고기 특유의 냄새를 싫어하지만 옛날 사람들은 고기 냄새를 좋아했고 고기국물의 기름을 목구멍의 때를 벗긴다고 마시기도 했다. 하동관의 약간 고기 냄새가 나면서도 적당히 기름진 맛은 옛날 서울 양반들의 즐겨 먹었던 서울식 곰탕의 원형을 보는 듯 하다.  

 주방의 바닥은 기름이 스며들어 미끌미끌하다. 그날 그날 닦아도 매일 매일 기름 일을 하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이 집의 할머니는 서울 북촌가 양반 출신의 시어머니께 이어받은 솜씨로 옛날 양반집의 맑고 담백한 곰탕맛을 이어가고 있다. 

 하동관 곰탕에 들어가는 곱창과 대창은 남다른 국물맛을 낸다. 또한 육질이 부드럽고, 고소하고, 진짜 고기국물 맛을 낼 수 있는 양지머리, 사태, 차돌배기를 고루 쓰고, 탕밥은 그냥 밥을 말아서는 잘 씹히지 않아 소화가 잘 안될 수가 있으니, 반드시 말렸다 불린 밥을 따뜻하게 토렴하여 손님상에 낸다.

 

 

 

 서울식 곰탕의 얹은 고기는 깔끔하게 양지수육과 내장 뿐이다. 수십년 동안 도마 위에서 춤추다가 닳아 사라진 칼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매일매일 많은 양의 고기를 썬다. 단단한 쇠도 2년밖에 되지 않는 시간동안 이렇게 닳았다.

 고기에 따라 써는 방식이 다른데 내장의 경우는 비스듬하게 썰고 양지는 똑바로 수직으로 썬다. 양반집에서는 고기를 몇 번 씹지 않아도 될 만큼 얇게 썰어내고 부위별로 일일이 골라 가지런히 밥 위에 얹는다. 육수를 토렴해 뚝배기가 아닌 놋그릇에 담으니 양반가의 곰탕 모습 그대로다. 그 옛날 가끔 한번씩 먹던 깊고 구수한 맛을 떠올리며 어르신들은 수십년 동안 곰탕을 먹고 추억을 곱씹는다.

 할머니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깍두기를 담는다. 곰탕이나 설렁탕에는 다른 대단한 반찬이 필요없이 맛있는 깍두기만 있으면 만사 OK인데 곰탕이나 설렁탕이 맛있는 집치고 깍두기가 맛없는 집이 거의 없다. 곰탕이 맛있어도 깍두기가 맛없으면 실망하게 될 정도로 깍두기는 곰탕을 먹는데 매우 중요하다. 이 곳의 깍두기는 군더더기 없는 서울식인데 서울식 깍두기는 다른 젓갈을 넣지 않고 새우젓 하나만 넣고 시원하고 깔끔한 맛이 특징이다.

 매일 깍두기를 담는 이유도 이 집 곰탕 맛에 깍두기가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국물이 묵직하고 진한 곰탕과 새콤하게 잘 익은 깍두기는 환상의 궁합을 보인다. 곰탕 맛을 즐기고 여기에 깍두기 국물을 넣어 먹는다면 가히 예술이라 할만 하다. 세월이 변하면서 사람들은 양반들의 곰탕을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바꾸며 곰탕을 신분의 구별이 없는 서민의 음식으로 만들었다.


 단골이 많은만큼 이 집에서만 통하는 언어가 있는데 우선 깍두기 국물은 깍국이라고 한다. 종업원에게 깍국을 달라고 하면 주전자에 가득 담긴 깍두기 국물을 취향대로 부어준다. 깍두기 국물은 다소 느끼할 수도 있는 국물을 개운하게 만들어 준다. 

 또 날계란을 파는데 이것을 곰탕 속에서 넣으면 백숙곰탕이 된다. 계란이 곰탕 속에 들어가면 닭 한마리가 되는 것이다. 꿈보다 해몽이 좋다. 옛날에는 영양이 부족했기 때문에 어디에든 계란 하나만 넣으면 영양 만점의 든든한 음식이 되기도 했다.

 이 집에는 부르는대로 가격과 양을 조절하여 먹을 수 있고 고기도 내장 많이, 양지 많이 하면 손님 취향대로 기름 양까지도 조절하여 만들어준다. 그리고 냉수 한잔 달라고 하면 큰 컵에 소주를 담아주는데 소주를 냉수라고 하는 것이 재밌다.

 곰탕을 만드는 사람은 우직한 성품이 곰탕과 꼭 닮았다. 인생을 즐기기보다 곰탕 하나를 바라보며 최고의 곰탕을 만들기 위해 수십년간 한 우물을 파 한그릇 속에 장인정신을 담았다. 그 맛은 대대손손 이어져 기억 속에 각인된 맛이 되고 그 맛은 문화가 되었다.

 한국문화라고 부르는 커다란 벽은 이들이 만들어놓은 벽돌 한장이 모여 이루어진 것으로 커다란 벽도 작은 벽돌들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법이다.

 장돌뱅이의 길을 따라서 전해지고 전해진 맛, 양반과 서민의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한솥에 어우러진 구수하고 진한 맛, 켜켜이 쌓인 세월에 따라 더해지고 더해진 맛. 곰탕의 진한 맛과 진국을 얻기 위해 오랜 시간 정성을 쏟는 어머니의 마음은 지금도 변함없이 더 진하게 우러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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コメント ( 6 )
  • 補身湯の作り方がわかりました。

    15年前

  •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11&dirId=11080102&docId=59474326&qb=7ISk66CB7YOVIOygnOq4sOuPmQ==&enc=utf8&section=kin&rank=3&search_sort=0&spq=0&pid=gUMhlsoi5TCssZ/tQ8hsss--175219&sid=TXOYgDdNc00AAE-BTsQ

    15年前

  • gussanp 03-06 19:11:08>貴方は、日韓離間の工作でもしているのかな?

    15年前

  • 朝鮮時代漢陽(今のソウル) 祭基洞の先農壇で作られた伝統食べ物の中でも有名な食べ物です ソルロンタンみたいな小骨やふたの骨鶏骨骨で作るおつゆが好きです.

    15年前

  • 文章を書くには長文だから言葉が多くなるので使わなかったです. 誠意がないと思っても少し理解してください. 申し訳ありません. ^^;;

    15年前

  • あ... ところで冷麺掲示物削除したがこれから掲示物削除しないでください.

    15年前

食べ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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