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1) 선토기 시대   





유러시아 대륙에 살고 있던 나우만 코끼리나 맘모스 등의 화석이 일본에서도 발견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수십만 년 전, 빙하기의 일본열도는 대륙과 이어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46년(昭和 21년) 郡馬縣(군마켄) 岩宿(이와쥬쿠) 등에서 깎아내어 만든 단면의 만동 롬 층에서 구석기시대의 타제석기가 발견되어 수십만 년 정도 전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무렵은 아직 토기가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선토기(先土器)시대라고 한다.





(2) 죠몬시대   





약 1만 년 전에 빙하시대가 끝나자 점차 기후가 따뜻해졌다. 빙하가 녹아서 해수면이 상승하고 지각 변동도 있어, 일본열도는 대륙에서 떨어졌다. 지금 형태로 된 것은 1만 년 전부터이다.



지금부터 1만 년 전부터 약 2300년(기원전 3세기) 전까지의 시대를 죠몬시대라고 하는데, 그것은 새끼줄 무늬의 토기가 사용되어졌기 때문에 시대 이름이 된 것이다. 이것이 일본의 신석기시대다.



이 무렵의 사람들은 수혈식주거에 모여 살았고(집단생활), 짐승이나 새를 사냥하기도 하고 물고기나 조개를 잡기도 하고 나무의 열매 등을 따서 생활하는 채집 경제를 이루었다. 특히, 수렵 기술이 크게 진보해서 석기는 날카로운 칼을 가진 마제석기가 사용되었다.



이 시대에는 아직 빈부의 차가 없었으며 주술이 매우 발달했다.





  (3) 야요이 시대   





기원전 3세기 경(지금부터 약 2300년 전), 농경문화가 시작되었다. 한반도로부터 기타규슈(北九州)에 새로운 생산 기술이 들어온 것이다.



벼농사는 점차로 일본 전체로 퍼져나갔다. 이 무렵의 수답은 낮은 습지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사람들은 낮은 지대로 옮겨서 살았다. 농업 생산 경제가 중심이 되자, 수답만들기, 씨뿌리기 등으로 인해, 집단의 통합이 강해지고 부락이 형성됨과 동시에 생산력도 높아졌다.



그러는 동안에 사람들 사이에는 부와 힘의 차가 생겨서, 한동안 부락끼리의 싸움이 있었다. 그래서 마침내 하나의 평야, 하나의 분지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큰 부락을 합한 “국가”가 생겼다.



기원전 1세기경에는 이 작은 국가가 100여 개 있었다. 그리고 기원전 3세기에는 중국에 사신을 보냈던 국가가 30여 개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국가는 히미코라는 여왕이 다스린 야마타이코쿠였다.



이 시대에는 벼농사와 함께 청동기 철기 등의 금속기도 대륙에서 전해졌다. 그리고 붉은 빛을 띤 얇고 딱딱한 토기도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것을 야요이토기라고 한다. 그리고 토기의 이름을 따서 이 시대를 야요이시대라고 한다.



또, 이 시대에 농경생활에 수반하는 신앙, 의례, 풍속 등도 널리 퍼져서 일본문화의 원형이 형성되었다.





  (4) 고분시대   







야요이 시대에는 작은 나라가 많이 생겨났지만, 이 나라들은 아직 하나로 통합되지는 않았다. 4세기 초 무렵 한 사람을 위해서 만든 큰 무덤이 생겨났다. 이것으로 보아 이 시기에 큰 권력을 가진 지배자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여러 가지 형태의 고분이 있지만,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 많고, 그 대부분이 나라켄과 오오사카에 있다.



새로운 정치 지배자는 처음에는 야마토 [긴키(近畿)지방]에 있는 작은 나라의 왕이었다. 그러나 점점 규슈북부에서 중부지방까지 지배하게 되어서 “대왕”이 되었던 것이다. 이 정치 권력을 야마토정권이라 한다. 이 정권을 후에 “조정”이라 부르게 되었다.



대왕은 작은 나라의 왕(호족이라는)의 지위를 전과 같이 인정했다. 이들 왕들에게 야마토정권의 뜻을 따르게 하였다. 이렇게 해서 야마토 대왕은 점차 서일본의 지배자가 되었던 것이다.



이 무렵은 대륙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철 베짜기 금속공예 등 여러 가지 기술이 일본에 들어왔다. 또, 중국에서 생겨난 한자도 한반도로부터 들어와서 일본에서 문자를 사용하게 되었다.





  (5) 아스카(飛鳥)시대 







고분시대 말기에(6세기 말에서 7세기 초 무렵), 중국 대륙에 강력하고 거대한 통일 국가가 생겨났다. 일본에도 이 영향을 받아서 중앙집권국가가 성립되었다.



6세기 말, 야마토 정권에서는 쇼토쿠(聖德)태자가 정치 권력을 쥐게 되었다. 호족과 협력해서 대왕 중심의 정치 구조를 만들기 위해, 대왕을 섬기는 호족의 각오를 나타낸 17조 헌법을 정했다.



또, 중국에 사신(견수사)를 보내어 문화를 받아들이는 일에 힘썼다. 쇼토쿠태자의 사후, 7세기 중엽에 대호족의 세력을 무너뜨리고, 대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 국가가 성립되었다. 당(唐)의 제도를 모방하여, 정치 제도를 정비했는데, 645년 처음으로 연호를 만들어 [다이카(大化)]라고 했기 때문에 이것을 [다이카노가이신(大和の改新)]이라 부른다. 이 새로운 제도에 의해 토지나 인민을 모두 대왕이 지배하기로 했다.



그리고 대왕의 권력은 점점 강력해졌다. 이 7세기 후반부터, 대왕 대신에 “천왕”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 같다. 또, 중국 율령을 모방한 다이호(大拱)율령이라는 법률이 만들어져서,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중앙집권 국가(율령국가)가 성립되어, 전국 지배체제와 조세제도 등이 완성되었다. 권력이 있는 호족은 율령국가의 관리가 되었다. 그리고, 이 제도에 의해서, 지위나 부를 자손에게 전해 주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귀족이라는 계층이 생겨났던 것이다.



쇼토쿠태자는 불교를 깊게 믿어 불교를 보급시키기 위하여 절이나 불상 등을 많이 만들어, 당시의 뛰어난 미술 공예품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 시대의 문화는 아먀토의 아스카를 중심으로 번영했기 때문에 아스카문화라고 한다.





  (6) 나라(奈良)시대 







국가 제도가 정비되어서 정치의 중심이 되는 수도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래서 710년에 조정은 중국의 수도를 모체로 해서 나라에 헤죠쿄(平城京)라는 훌륭한 수도를 지었다. 헤죠쿄는 약 70년간 수도로 번창했는데, 이 시대를 나라시대라고 한다.



나라시대에는 다이호율령을 기초로 해서 천황 중심의 정치(율령정치)가 실시되어, 수도는 번창하고, 귀족은 화려한 생활을 즐겼다. 그러나 농민은 노역 병역 등으로 생활이 점점 어렵게 되어 토지를 버리고 도망치는 사람들이 증가했다. 그 시점에서 조정은 새로운 토지를 개간한 사람에게 그 토지를 주는 규칙을 만들었다. 그러자, 힘 있는 귀족이나 절과 신사에서 개간에 나서 자신들의 토지를 늘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생긴 사유지(후에 장원이라고 불렸다)는 그 후 더욱더 늘어나서 율령 정치의 근본인 [공지 공민제도]가 무너져 조정의 정치도 문란해졌다.



이 시대에는 [고지키(古事記]와 [니혼쇼키(日本書紀)]라는 2개의 역사 책과 천황에서 농민에 이르기까지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지은 약 4,500수의 노래를 모은 [만요슈(萬葉集)]가 만들어졌다.



나라시대의 문화는 [덴표(天平)]라는 연호가 사용되었을 때 가장 번영하였기 때문에 덴표문화라고 부르고 있다.



견당사를 통하여 당의 문화가 활발하게 도입되고, 또 호국 종교로서 불교를 중요시 여겼기 때문에, 덴표문화는 당의 영향을 많이 받은 불교를 중심으로 한 문화로 매우 화려했던 문화였다.





  (7) 헤안(平安)시대   







794년 간무(桓武)천황은 율령정치를 재정비하기 위하여 수도를 교토(京都)로 옮겼다(헤안쿄). 이 때부터 약 400년 간을 헤안시대라고 한다.



많은 장원을 가진 유력한 귀족이었던 후지와라시(藤原氏)는 딸을 천황과 결혼시켜, 황태자를 천황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천황이 어릴 때는 섭정으로 성인이 되고나서부터는 관백이 되어 정치를 했다. 즉, 귀족이 천황 대신에 정치권력을 가지게 된 귀족정치의 시초이다. 후지와라시는 11세기 초의 미치나가, 요리미치 부자 시대에 더욱더 번영했다.



이 헤안시대에는 견당사가 폐지되어, 일본의 자연이나 일본인의 생활에 맞는 문화가 일어났다[고쿠후(國風)문화]. 이 새로운 문화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일본의 문자 [히라가나, 가타카나]를 만든 것이다.



가나가 만들어지고 나서부터 여성이 쓴 일기나 수필, 이야기 등의 문학 작품이 많이 생겨났다. 그 중에서 장편소설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나 수필 [마쿠라노소시(枕草子)]가 특히 유명하다.



이 시대의 종교로서는 엄격한 계율이나 학문을 중요시한 새로운 불교가 전해져서, 수도에서 떨어진 절을 짓게 되었다.



후지와라시가 수도에서 화려한 생활을 하고 있었던 10세기 경, 지방에서는 무기를 가진 유력한 농민이 생겨서 지방의 정치가 문란해지기 시작했다. 이 농민이 후에는 무사가 되지만, 처음에는 자신의 토지를 지키거나 지방에서 세력을 떨치기 위하여 힘을 비축했었다. 그러나 수도에 있는 귀족은 무사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려고 했기 때문에 이 지방의 무사단은 중앙귀족과 결탁해서 세력을 넓힐 수가 있었다. 그 중에서 특히 힘이 강했던 것이 겐지(源氏)와 헤시(平氏)였다.



12세기 중엽 교토의 귀족들 사이에서 권력다툼이 있었다. 이 싸움 때 무사단이 강력한 힘을 과시하였는데, 그 중에서 특히 힘이 있었던 헤시(平氏)의 다이라노키요모리(平淸盛)가 권력을 잡게 되었다.



다이라노키요모리(平淸盛)는 무사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통치 방법이 귀족들과 다르지 않았기 때문에, 지방의 무사단은 이러한 헤시에 반발해서 그를 무너뜨리려고 했다. 결국, 12세기 말 경 源氏의 미나모토요리토모(源賴朝)가 헤시를 무너뜨렸다.





  (8) 가마쿠라(鎌倉)시대 







平氏를 무너뜨린 미나모토요리토모(源賴朝)는 가마쿠라[가나가와켄(神奈川縣)]를 근거지로 정하고 무사정권(막부)을 수립하였다(1192년). 이 가마쿠라막부는 약 140년간 계속되었는데, 이 기간을 가마쿠라시대(1192-1333)라고 한다.



이 시기에는 귀족(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교토조정)과 무사(장군을 중심으로 하는 가마쿠라 막부)의 이중 정권이 있었다.



요리토모의 사후, 막부의 실권은 처의 생가인 호죠氏 옮겨졌다. 막부는 죠큐노란(承久の亂)으로 힘을 강화했지만, 중국의 원이 공격해 온 겐코(元寇)를 계기로 막부에 불만을 가졌던 무사들이 명령을 따르지 않아서 힘이 쇠퇴했다.



그래서 무사정권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천황은 막부에 불만을 가진 무사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서 1333년에 가마쿠라막부를 멸망시켰다.



전란이 계속된 불안한 세상에서 무사나 농민은 종교를 통해 구원을 얻고자했기 때문에 새로운 불교가 잇달아 일어났다. 신란(新鸞), 니치렌(日連)에 의한 이 때의 불교는 귀족중심의 헤안시대와는 달리, 이해하기 쉽고 실천을 중시한 것이었다.



가마쿠라시대의 문화는 무사들의 세계를 반영한 것이 많아서, 무사들의 분쟁을 그린 군키모노(軍記物)가 생겨났다. 그 중에서 특히, 유명한 것이 [헤케모노가타리(平家物語)]이다. 또, 수필 [호죠키(方丈記)]와 [쓰레즈레구사(徒然草)]도 이 시대에 쓰여진 걸작이다.





  (9) 무로마치(室町)시대 







가마쿠라를 무너뜨린 천황은 천황 중심의 새로운 정치를 시작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막부를 무너뜨렸을 때 가장 유력한 무장이었던 아시카가타카우지(足利尊氏)가 반란을 일으켜, 교토의 무로마치에 막부를 세워 정치를 시작했던 것이다. 이 막부를 무로마치 막부라 하고, 이 시대를 무로마치시대(1338-1573)라고 한다.



이 시대는 약 240년간 계속되었는데, 사회는 안정되지 않았다. 아시카가에게 권력을 빼앗긴 천황이 자신 정통 천황이라고 주장하는 한편(남조), 교토에도 새로운 천황이 생겼다(북조). 이 두 조정이 대립한 남북조의 싸움이 57년간이나 계속되었다.



1392년 아시카가시는 남조와 북조를 통일하여 14세기 말에는 전국을 지배하였다. 15세기 후반 막부와 [슈고다이묘(守護大名) -세력을 확장한 지방의 유력한 무사] 사이에서 분쟁이 일어나서, 11년간 싸움이 이어졌다[오닌노란(應仁の亂)]. 그래서 막부의 권위는 약화되었다.



이 무렵은 주인인 다이묘보다 가신이 실력을 가지고 있어서 힘으로 밑에 있는 사람이 위에 있는 사람을 쓰러뜨리는 식의 일이 있었다. 다만 오린노란의 영향으로 가신은 힘이 더욱 강해져서 각지에서 주인과 실력 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100년간 계속된 이 시대를 센코쿠(戰國)시대라 한다. 실력으로 주인을 쓰러뜨리고 다이묘가 된 자를 센코쿠다이묘(戰國大名)라고 하는데, 센코쿠다이묘는 자신의 영지를 안정시키기 위해서, 산업을 활성화하기도 하고 군사력을 늘리기도 했다.



또 이 시대에는 상공업도 발달했고 각 지방의 특색있는 특산품도 생산되게 되었다. 무로마치 시대의 문화는 무사다운 것과 귀족다운 것이 융화되어 새로운 부케(武家)문화를 완성했다. 또, 수도의 문화가 지방에까지 퍼져서, 각지에 민중문화가 생겨났다.



아시카가요시미치(足利義滿)가 교토의 기타야마(北山)에 세운 긴카쿠(金閣)와 아시카가요시마사(足利義政)가 교토의 히가시야마(東山)에 세운 긴카쿠(銀閣)가 유명하다. 그리고 일본 전통공예인 노가쿠(能樂), 교겐(狂言), 일본인이 차를 즐기는 풍습도 이 무로마치시대에 생겨난 것이다.





  (10) 아즈치모모야마(安土桃山)시대 







전국시대가 끝나고, 전국이 통일되어 오다노부나가(織田信長)와 도요토미히데요시(豊臣秀吉)가 정권을 잡은 시대를 아즈치모모야마시대라고 한다. 센코쿠다이묘(戰國大名)의 노부나가의 전국통일의 꿈은 가신(家臣)에게 공격을 받아 죽게 되자 무산되었다[혼노지노헨(本能寺の變). 노부나가의 뜻을 이어 받은 가신 도요토미히데요시에 의해 마침내 국내가 통일되었다.



그 후 히데요시는 조선과 중국에도 세력을 넓히기 위해 조선에 두 번 군대를 보냈지만, 두 번 모두 실패로 끝났다(임진왜란)



아즈치모모야마시대는 호화롭고 웅대한 문화가 특징이다. 이것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 성으로, 아즈치모모야마(安土桃山)라는 시대 이름도 노부나가(信長)와 히데요시(秀吉)의 거성의 지명에서 유래된 것이다.



또, 난반(南蠻)무역으로 여러 가지 서양문물이 들어왔다. 현재도 사용되고 있는 빵, 즈봉, 카스테라 등의 외래어는 당시 포르투칼에서 일본어가 된 것이다.





  (11) 에도시대   







도요토미히데요시(豊臣秀吉)의 사후, 승패를 판가름한 「세키가하라노 타다카이(關ケ原の戰い)」에서 이긴 도쿠가와이에야스(德川家康)가 1603년에 막부를 에도(지금의 도쿄)에 열었다. 이 후 260년 간을 에도시대라고 한다.



3대 장군 이에미츠(家光) 집권시, 막부의 조직과 상킨코타이(參勤交代)제도가 갖추어져, 막부 체제의 안정기를 맞이했다. 막부는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네덜란드·청(중국) 이외의 나라와의 무역이나 일본인의 해외 도항을 금지하는 쇄국정책을 펴서, 에도시대 말까지 계속되었다. 이 시대의 문화적 특징은 서민문화가 발달했던 것이다.



17세기 말부터 18세기 초에는, 상업이 발달한 오오사카의 조닌(상인)을 중심으로 문화가 발달했으며, 이하라사이카쿠(井原西鶴), 지카마쓰몬자에몬(近松門左偉門), 마쓰오바쇼(松尾芭蕉) 등이 활약했다. 이것을 겐로쿠(元祿) 문화라고 한다. 또 19세기 초에는 문화의 중심이 에도로 옮겨져서 소설, 가부키(歌舞伎), 우키요에(浮世繪) 등 다채로운 조닌(町人) 문화가 번영했다.



그러나, 18세기 경부터 막부체제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18세기 후반이 되자 외국 배가 일본 근해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마침내 아메리카의 페리 내항으로 의해 쇄국정책을 고수하지 못하고 개국했다. 개국 후 경제사정은 나빠지고 민중 생활은 점점 어려워졌다. 사쓰마[시금의 가고시마켄(鹿兒島縣)]과 조슈[지금의 야마구치켄(山口縣)]를 중심으로 한 막부 타도운동이 고조되어, 마침내 15대 장군 도쿠가와요시노부(德川慶喜)가 1867년 다이세호칸(大政奉還)을 실행해, 에도막부는 무너지고, 메지(明治) 신정부로 정권이 넘어갔다.





  (12) 메지(明治)   







19세기 후반의 개국을 기회로 일본은 근대국가로 급성장했다. 신정부는 반(藩) 제도를 폐지하여 현(縣)제도를 도입하고, 토지세개정, 징병령을 공포하는 등 정치 사회 개혁을 점진적으로 추진하고, 메지(明治)헌법을 제정, 국회를 개설했다. 마침내 청일, 러일 전쟁에서 승리를 계기로 경제 발전을 이루었다. 메지문화는 전통문화와 구미문화가 대립, 통합 되어가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13) 다이쇼·쇼화(大正·昭和)   







다이쇼로 들어서자 민주주의의 기운이 높아지고, 다이쇼부터 쇼와초기에 걸쳐서는 정당을 중심으로 한 정치가 계속되었다. 그러나 불황속에서 군국주의가 세력을 확장하여 쇼와 초기인 1930년부터 15년간 전쟁에 돌입했다. 제 2차 세계대전에서 진 일본은 민주적이고 부강한 국가 건설을 지향하며 전진했다. 그 결과 경이적인 경제 성장을 이룩하였다.



지금의 일본은 64년간 계속된 쇼와가 끝나고 1989년에 헤세(平成)를 맞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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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료는 [ 황인상의 일본알기 ] 란 홈페이지에서 퍼온 내용입니다.


[공부자료] 일본 역사 개요 ( 시대별 정리)


(1) 선토기 시대


유러시아 대륙에 살고 있던 나우만 코끼리나 맘모스 등의 화석이 일본에서도 발견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수십만 년 전, 빙하기의 일본열도는 대륙과 이어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46년(昭和 21년) 郡馬縣(군마켄) 岩宿(이와쥬쿠) 등에서 깎아내어 만든 단면의 만동 롬 층에서 구석기시대의 타제석기가 발견되어 수십만 년 정도 전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무렵은 아직 토기가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선토기(先土器)시대라고 한다.


(2) 죠몬시대


약 1만 년 전에 빙하시대가 끝나자 점차 기후가 따뜻해졌다. 빙하가 녹아서 해수면이 상승하고 지각 변동도 있어, 일본열도는 대륙에서 떨어졌다. 지금 형태로 된 것은 1만 년 전부터이다.

지금부터 1만 년 전부터 약 2300년(기원전 3세기) 전까지의 시대를 죠몬시대라고 하는데, 그것은 새끼줄 무늬의 토기가 사용되어졌기 때문에 시대 이름이 된 것이다. 이것이 일본의 신석기시대다.

이 무렵의 사람들은 수혈식주거에 모여 살았고(집단생활), 짐승이나 새를 사냥하기도 하고 물고기나 조개를 잡기도 하고 나무의 열매 등을 따서 생활하는 채집 경제를 이루었다. 특히, 수렵 기술이 크게 진보해서 석기는 날카로운 칼을 가진 마제석기가 사용되었다.

이 시대에는 아직 빈부의 차가 없었으며 주술이 매우 발달했다.


(3) 야요이 시대


기원전 3세기 경(지금부터 약 2300년 전), 농경문화가 시작되었다. 한반도로부터 기타규슈(北九州)에 새로운 생산 기술이 들어온 것이다.

벼농사는 점차로 일본 전체로 퍼져나갔다. 이 무렵의 수답은 낮은 습지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사람들은 낮은 지대로 옮겨서 살았다. 농업 생산 경제가 중심이 되자, 수답만들기, 씨뿌리기 등으로 인해, 집단의 통합이 강해지고 부락이 형성됨과 동시에 생산력도 높아졌다.

그러는 동안에 사람들 사이에는 부와 힘의 차가 생겨서, 한동안 부락끼리의 싸움이 있었다. 그래서 마침내 하나의 평야, 하나의 분지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큰 부락을 합한 "국가"가 생겼다.

기원전 1세기경에는 이 작은 국가가 100여 개 있었다. 그리고 기원전 3세기에는 중국에 사신을 보냈던 국가가 30여 개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국가는 히미코라는 여왕이 다스린 야마타이코쿠였다.

이 시대에는 벼농사와 함께 청동기 철기 등의 금속기도 대륙에서 전해졌다. 그리고 붉은 빛을 띤 얇고 딱딱한 토기도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것을 야요이토기라고 한다. 그리고 토기의 이름을 따서 이 시대를 야요이시대라고 한다.

또, 이 시대에 농경생활에 수반하는 신앙, 의례, 풍속 등도 널리 퍼져서 일본문화의 원형이 형성되었다.


(4) 고분시대



야요이 시대에는 작은 나라가 많이 생겨났지만, 이 나라들은 아직 하나로 통합되지는 않았다. 4세기 초 무렵 한 사람을 위해서 만든 큰 무덤이 생겨났다. 이것으로 보아 이 시기에 큰 권력을 가진 지배자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여러 가지 형태의 고분이 있지만,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 많고, 그 대부분이 나라켄과 오오사카에 있다.

새로운 정치 지배자는 처음에는 야마토 [긴키(近畿)지방]에 있는 작은 나라의 왕이었다. 그러나 점점 규슈북부에서 중부지방까지 지배하게 되어서 "대왕"이 되었던 것이다. 이 정치 권력을 야마토정권이라 한다. 이 정권을 후에 "조정"이라 부르게 되었다.

대왕은 작은 나라의 왕(호족이라는)의 지위를 전과 같이 인정했다. 이들 왕들에게 야마토정권의 뜻을 따르게 하였다. 이렇게 해서 야마토 대왕은 점차 서일본의 지배자가 되었던 것이다.

이 무렵은 대륙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철 베짜기 금속공예 등 여러 가지 기술이 일본에 들어왔다. 또, 중국에서 생겨난 한자도 한반도로부터 들어와서 일본에서 문자를 사용하게 되었다.


(5) 아스카(飛鳥)시대



고분시대 말기에(6세기 말에서 7세기 초 무렵), 중국 대륙에 강력하고 거대한 통일 국가가 생겨났다. 일본에도 이 영향을 받아서 중앙집권국가가 성립되었다.

6세기 말, 야마토 정권에서는 쇼토쿠(聖德)태자가 정치 권력을 쥐게 되었다. 호족과 협력해서 대왕 중심의 정치 구조를 만들기 위해, 대왕을 섬기는 호족의 각오를 나타낸 17조 헌법을 정했다.

또, 중국에 사신(견수사)를 보내어 문화를 받아들이는 일에 힘썼다. 쇼토쿠태자의 사후, 7세기 중엽에 대호족의 세력을 무너뜨리고, 대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 국가가 성립되었다. 당(唐)의 제도를 모방하여, 정치 제도를 정비했는데, 645년 처음으로 연호를 만들어 [다이카(大化)]라고 했기 때문에 이것을 [다이카노가이신(大和の改新)]이라 부른다. 이 새로운 제도에 의해 토지나 인민을 모두 대왕이 지배하기로 했다.

그리고 대왕의 권력은 점점 강력해졌다. 이 7세기 후반부터, 대왕 대신에 "천왕"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 같다. 또, 중국 율령을 모방한 다이호(大拱)율령이라는 법률이 만들어져서,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중앙집권 국가(율령국가)가 성립되어, 전국 지배체제와 조세제도 등이 완성되었다. 권력이 있는 호족은 율령국가의 관리가 되었다. 그리고, 이 제도에 의해서, 지위나 부를 자손에게 전해 주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귀족이라는 계층이 생겨났던 것이다.

쇼토쿠태자는 불교를 깊게 믿어 불교를 보급시키기 위하여 절이나 불상 등을 많이 만들어, 당시의 뛰어난 미술 공예품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 시대의 문화는 아먀토의 아스카를 중심으로 번영했기 때문에 아스카문화라고 한다.


(6) 나라(奈良)시대



국가 제도가 정비되어서 정치의 중심이 되는 수도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래서 710년에 조정은 중국의 수도를 모체로 해서 나라에 헤죠쿄(平城京)라는 훌륭한 수도를 지었다. 헤죠쿄는 약 70년간 수도로 번창했는데, 이 시대를 나라시대라고 한다.

나라시대에는 다이호율령을 기초로 해서 천황 중심의 정치(율령정치)가 실시되어, 수도는 번창하고, 귀족은 화려한 생활을 즐겼다. 그러나 농민은 노역 병역 등으로 생활이 점점 어렵게 되어 토지를 버리고 도망치는 사람들이 증가했다. 그 시점에서 조정은 새로운 토지를 개간한 사람에게 그 토지를 주는 규칙을 만들었다. 그러자, 힘 있는 귀족이나 절과 신사에서 개간에 나서 자신들의 토지를 늘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생긴 사유지(후에 장원이라고 불렸다)는 그 후 더욱더 늘어나서 율령 정치의 근본인 [공지 공민제도]가 무너져 조정의 정치도 문란해졌다.

이 시대에는 [고지키(古事記]와 [니혼쇼키(日本書紀)]라는 2개의 역사 책과 천황에서 농민에 이르기까지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지은 약 4,500수의 노래를 모은 [만요슈(萬葉集)]가 만들어졌다.

나라시대의 문화는 [덴표(天平)]라는 연호가 사용되었을 때 가장 번영하였기 때문에 덴표문화라고 부르고 있다.

견당사를 통하여 당의 문화가 활발하게 도입되고, 또 호국 종교로서 불교를 중요시 여겼기 때문에, 덴표문화는 당의 영향을 많이 받은 불교를 중심으로 한 문화로 매우 화려했던 문화였다.


(7) 헤안(平安)시대



794년 간무(桓武)천황은 율령정치를 재정비하기 위하여 수도를 교토(京都)로 옮겼다(헤안쿄). 이 때부터 약 400년 간을 헤안시대라고 한다.

많은 장원을 가진 유력한 귀족이었던 후지와라시(藤原氏)는 딸을 천황과 결혼시켜, 황태자를 천황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천황이 어릴 때는 섭정으로 성인이 되고나서부터는 관백이 되어 정치를 했다. 즉, 귀족이 천황 대신에 정치권력을 가지게 된 귀족정치의 시초이다. 후지와라시는 11세기 초의 미치나가, 요리미치 부자 시대에 더욱더 번영했다.

이 헤안시대에는 견당사가 폐지되어, 일본의 자연이나 일본인의 생활에 맞는 문화가 일어났다[고쿠후(國風)문화]. 이 새로운 문화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일본의 문자 [히라가나, 가타카나]를 만든 것이다.

가나가 만들어지고 나서부터 여성이 쓴 일기나 수필, 이야기 등의 문학 작품이 많이 생겨났다. 그 중에서 장편소설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나 수필 [마쿠라노소시(枕草子)]가 특히 유명하다.

이 시대의 종교로서는 엄격한 계율이나 학문을 중요시한 새로운 불교가 전해져서, 수도에서 떨어진 절을 짓게 되었다.

후지와라시가 수도에서 화려한 생활을 하고 있었던 10세기 경, 지방에서는 무기를 가진 유력한 농민이 생겨서 지방의 정치가 문란해지기 시작했다. 이 농민이 후에는 무사가 되지만, 처음에는 자신의 토지를 지키거나 지방에서 세력을 떨치기 위하여 힘을 비축했었다. 그러나 수도에 있는 귀족은 무사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려고 했기 때문에 이 지방의 무사단은 중앙귀족과 결탁해서 세력을 넓힐 수가 있었다. 그 중에서 특히 힘이 강했던 것이 겐지(源氏)와 헤시(平氏)였다.

12세기 중엽 교토의 귀족들 사이에서 권력다툼이 있었다. 이 싸움 때 무사단이 강력한 힘을 과시하였는데, 그 중에서 특히 힘이 있었던 헤시(平氏)의 다이라노키요모리(平淸盛)가 권력을 잡게 되었다.

다이라노키요모리(平淸盛)는 무사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통치 방법이 귀족들과 다르지 않았기 때문에, 지방의 무사단은 이러한 헤시에 반발해서 그를 무너뜨리려고 했다. 결국, 12세기 말 경 源氏의 미나모토요리토모(源賴朝)가 헤시를 무너뜨렸다.


(8) 가마쿠라(鎌倉)시대



平氏를 무너뜨린 미나모토요리토모(源賴朝)는 가마쿠라[가나가와켄(神奈川縣)]를 근거지로 정하고 무사정권(막부)을 수립하였다(1192년). 이 가마쿠라막부는 약 140년간 계속되었는데, 이 기간을 가마쿠라시대(1192-1333)라고 한다.

이 시기에는 귀족(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교토조정)과 무사(장군을 중심으로 하는 가마쿠라 막부)의 이중 정권이 있었다.

요리토모의 사후, 막부의 실권은 처의 생가인 호죠氏 옮겨졌다. 막부는 죠큐노란(承久の亂)으로 힘을 강화했지만, 중국의 원이 공격해 온 겐코(元寇)를 계기로 막부에 불만을 가졌던 무사들이 명령을 따르지 않아서 힘이 쇠퇴했다.

그래서 무사정권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천황은 막부에 불만을 가진 무사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서 1333년에 가마쿠라막부를 멸망시켰다.

전란이 계속된 불안한 세상에서 무사나 농민은 종교를 통해 구원을 얻고자했기 때문에 새로운 불교가 잇달아 일어났다. 신란(新鸞), 니치렌(日連)에 의한 이 때의 불교는 귀족중심의 헤안시대와는 달리, 이해하기 쉽고 실천을 중시한 것이었다.

가마쿠라시대의 문화는 무사들의 세계를 반영한 것이 많아서, 무사들의 분쟁을 그린 군키모노(軍記物)가 생겨났다. 그 중에서 특히, 유명한 것이 [헤케모노가타리(平家物語)]이다. 또, 수필 [호죠키(方丈記)]와 [쓰레즈레구사(徒然草)]도 이 시대에 쓰여진 걸작이다.


(9) 무로마치(室町)시대



가마쿠라를 무너뜨린 천황은 천황 중심의 새로운 정치를 시작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막부를 무너뜨렸을 때 가장 유력한 무장이었던 아시카가타카우지(足利尊氏)가 반란을 일으켜, 교토의 무로마치에 막부를 세워 정치를 시작했던 것이다. 이 막부를 무로마치 막부라 하고, 이 시대를 무로마치시대(1338-1573)라고 한다.

이 시대는 약 240년간 계속되었는데, 사회는 안정되지 않았다. 아시카가에게 권력을 빼앗긴 천황이 자신 정통 천황이라고 주장하는 한편(남조), 교토에도 새로운 천황이 생겼다(북조). 이 두 조정이 대립한 남북조의 싸움이 57년간이나 계속되었다.

1392년 아시카가시는 남조와 북조를 통일하여 14세기 말에는 전국을 지배하였다. 15세기 후반 막부와 [슈고다이묘(守護大名) -세력을 확장한 지방의 유력한 무사] 사이에서 분쟁이 일어나서, 11년간 싸움이 이어졌다[오닌노란(應仁の亂)]. 그래서 막부의 권위는 약화되었다.

이 무렵은 주인인 다이묘보다 가신이 실력을 가지고 있어서 힘으로 밑에 있는 사람이 위에 있는 사람을 쓰러뜨리는 식의 일이 있었다. 다만 오린노란의 영향으로 가신은 힘이 더욱 강해져서 각지에서 주인과 실력 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100년간 계속된 이 시대를 센코쿠(戰國)시대라 한다. 실력으로 주인을 쓰러뜨리고 다이묘가 된 자를 센코쿠다이묘(戰國大名)라고 하는데, 센코쿠다이묘는 자신의 영지를 안정시키기 위해서, 산업을 활성화하기도 하고 군사력을 늘리기도 했다.

또 이 시대에는 상공업도 발달했고 각 지방의 특색있는 특산품도 생산되게 되었다. 무로마치 시대의 문화는 무사다운 것과 귀족다운 것이 융화되어 새로운 부케(武家)문화를 완성했다. 또, 수도의 문화가 지방에까지 퍼져서, 각지에 민중문화가 생겨났다.

아시카가요시미치(足利義滿)가 교토의 기타야마(北山)에 세운 긴카쿠(金閣)와 아시카가요시마사(足利義政)가 교토의 히가시야마(東山)에 세운 긴카쿠(銀閣)가 유명하다. 그리고 일본 전통공예인 노가쿠(能樂), 교겐(狂言), 일본인이 차를 즐기는 풍습도 이 무로마치시대에 생겨난 것이다.


(10) 아즈치모모야마(安土桃山)시대



전국시대가 끝나고, 전국이 통일되어 오다노부나가(織田信長)와 도요토미히데요시(豊臣秀吉)가 정권을 잡은 시대를 아즈치모모야마시대라고 한다. 센코쿠다이묘(戰國大名)의 노부나가의 전국통일의 꿈은 가신(家臣)에게 공격을 받아 죽게 되자 무산되었다[혼노지노헨(本能寺の變). 노부나가의 뜻을 이어 받은 가신 도요토미히데요시에 의해 마침내 국내가 통일되었다.

그 후 히데요시는 조선과 중국에도 세력을 넓히기 위해 조선에 두 번 군대를 보냈지만, 두 번 모두 실패로 끝났다(임진왜란)

아즈치모모야마시대는 호화롭고 웅대한 문화가 특징이다. 이것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 성으로, 아즈치모모야마(安土桃山)라는 시대 이름도 노부나가(信長)와 히데요시(秀吉)의 거성의 지명에서 유래된 것이다.

또, 난반(南蠻)무역으로 여러 가지 서양문물이 들어왔다. 현재도 사용되고 있는 빵, 즈봉, 카스테라 등의 외래어는 당시 포르투칼에서 일본어가 된 것이다.


(11) 에도시대



도요토미히데요시(豊臣秀吉)의 사후, 승패를 판가름한 「세키가하라노 타다카이(關ケ原の戰い)」에서 이긴 도쿠가와이에야스(德川家康)가 1603년에 막부를 에도(지금의 도쿄)에 열었다. 이 후 260년 간을 에도시대라고 한다.

3대 장군 이에미츠(家光) 집권시, 막부의 조직과 상킨코타이(參勤交代)제도가 갖추어져, 막부 체제의 안정기를 맞이했다. 막부는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네덜란드·청(중국) 이외의 나라와의 무역이나 일본인의 해외 도항을 금지하는 쇄국정책을 펴서, 에도시대 말까지 계속되었다. 이 시대의 문화적 특징은 서민문화가 발달했던 것이다.

17세기 말부터 18세기 초에는, 상업이 발달한 오오사카의 조닌(상인)을 중심으로 문화가 발달했으며, 이하라사이카쿠(井原西鶴), 지카마쓰몬자에몬(近松門左偉門), 마쓰오바쇼(松尾芭蕉) 등이 활약했다. 이것을 겐로쿠(元祿) 문화라고 한다. 또 19세기 초에는 문화의 중심이 에도로 옮겨져서 소설, 가부키(歌舞伎), 우키요에(浮世繪) 등 다채로운 조닌(町人) 문화가 번영했다.

그러나, 18세기 경부터 막부체제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18세기 후반이 되자 외국 배가 일본 근해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마침내 아메리카의 페리 내항으로 의해 쇄국정책을 고수하지 못하고 개국했다. 개국 후 경제사정은 나빠지고 민중 생활은 점점 어려워졌다. 사쓰마[시금의 가고시마켄(鹿兒島縣)]과 조슈[지금의 야마구치켄(山口縣)]를 중심으로 한 막부 타도운동이 고조되어, 마침내 15대 장군 도쿠가와요시노부(德川慶喜)가 1867년 다이세호칸(大政奉還)을 실행해, 에도막부는 무너지고, 메지(明治) 신정부로 정권이 넘어갔다.


(12) 메지(明治)



19세기 후반의 개국을 기회로 일본은 근대국가로 급성장했다. 신정부는 반(藩) 제도를 폐지하여 현(縣)제도를 도입하고, 토지세개정, 징병령을 공포하는 등 정치 사회 개혁을 점진적으로 추진하고, 메지(明治)헌법을 제정, 국회를 개설했다. 마침내 청일, 러일 전쟁에서 승리를 계기로 경제 발전을 이루었다. 메지문화는 전통문화와 구미문화가 대립, 통합 되어가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13) 다이쇼·쇼화(大正·昭和)



다이쇼로 들어서자 민주주의의 기운이 높아지고, 다이쇼부터 쇼와초기에 걸쳐서는 정당을 중심으로 한 정치가 계속되었다. 그러나 불황속에서 군국주의가 세력을 확장하여 쇼와 초기인 1930년부터 15년간 전쟁에 돌입했다. 제 2차 세계대전에서 진 일본은 민주적이고 부강한 국가 건설을 지향하며 전진했다. 그 결과 경이적인 경제 성장을 이룩하였다.

지금의 일본은 64년간 계속된 쇼와가 끝나고 1989년에 헤세(平成)를 맞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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