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日本の古代史には日本書紀の虚構の人物ではない中国南北朝時代歴史書に登場する 5人の実存 倭王が存在する.
倭王は中国南朝の 宋に朝貢を捧げて冊封を受けて韓半島南部国々の軍事圏を含んだ冊封を要請するのに,
その要請を根拠で大和が韓半島南部を実際に統治したと言う恥ずかしい主張は日本の正式歴史学界では展開されないが,
日本では嘘で歴史を捏造する人がよほど多くて, 歴史をよく分からない日本人に嘘を流布する場合が多数あるから教える.
倭王が初めて 宋に冊封を要請したことは 438年 倭王珍によるからだ.
倭王珍は 「倭, 百済, 新羅, 任那, 秦韓, 慕韓六国諸軍事」「安東大将軍」倭国王を要請するが,
6国に関したことは棄却されて 「安東大将軍」より低い 「安東将軍」 倭国王に冊封される.
宋は大和が韓半島南部に対する権力がないというのをもうはじめから大略的な把握をしていたから 倭王珍の要請を棄却したことと見える.
443年 倭王珍の後任である倭王済にも 6国に関する棄却されるが,
451年には 倭王済の再要請を受けて上げて 「倭, 新羅, 任那, 加羅, 秦韓, 慕韓六国諸軍事」「安東将軍」倭国王に冊封される.
5国は 宋に朝貢しない関係ない国で倭国は朝貢する国だから嘘でも倭国を待偶して要請を受けて上げたように見える.
しかし百済とは使臣が通交するから大和の嘘が通じないで棄却されたし, 鎭東大将軍 百済王で相変らず倭王より高い官爵に大宇される.
その後 倭王武までも倭王の官爵要請は続いて, 「安東大将軍」で昇格もなるが,
終わりまで百済に関する倭国の要請は承認されないで, 百済王よりは低い官爵に大宇される.
倭王が要請した官職には自分が実際に支配する列島の多くの国に対する名前は全然登場しなくて, 官職にある国の名前は実在する支配力はなくて願う事を盛っておいたことであるだけだというなどの他の説明がもっとあるがここでは略する.
百済が日本の属国という嘘の歴史を説破する日本人の主張によれば,
自分の要請が断れて百済王より低い待遇を受けるこんな外交的屈辱は当然ありえない事だが,
百済が日本に統制される属国というのは嘘だったから倭王の要請はいつも断られて百済王より低い待遇を受けたのだ.
その次, 新羅は当時どんな状況だったろうか?
新羅は広開土大王以来で 400年から 463年まで高句麗の軍隊が駐屯して支配受けている状況だった.
それが事実なら倭王は韓半島の南部が自分の統制とは関係ないことをよく分かっていながらも故意に嘘ついたことが証明される.
その頃高句麗の新羅支配は文献研究だけではなく考古学でも証明される.
韓半島南部にはその頃に立てられた高句麗碑石が二つ発見される.


一つは新羅北部と同時に高句麗南部である忠清道忠州地域, 他の一つは新羅の首都宮城遺跡内部で発見されたのだ.
碑石には新羅王は高句麗太王と太子に服属して新羅の領土内に高句麗軍隊が駐屯する. というなどの内容が記録されている.
日本人の主張は日本人の嘘宣言で成り立っていたことだが高句麗の支配力は実在する歴史を記録した本当の歴史だったことだ.
それなら 倭王が中国に韓半島南部の軍事圏官職を要求したことは何だったことだろう?
百済との外交関係で優位を占めるため, あるいは列島内部宣伝用など説明にはさまざまがあるが
確かなことは,

江戸時代にも日本がオランダには朝鮮が日本の属国だと嘘と
朝鮮にはオランダが日本の属国だと嘘ついたことのように
古代にも恥ずかしい嘘をついていたのだ.

일본의 고대사에는 일본서기의 허구의 인물이 아닌 중국 남북조시대 역사서에 등장하는 5명의 실존 倭王이 존재한다.
倭王은 중국 남조의 宋에게 조공을 바치고 책봉을 받으며 한반도 남부 국가들의 군사권을 포함한 책봉을 요청하는데,
그 요청을 근거로 야마토가 한반도 남부를 실제로 통치했다고 하는 부끄러운 주장은 일본의 정식 역사 학계에서는 전개되지 않으나,
일본에선 거짓말로 역사를 날조하는 사람이 상당히 많아, 역사를 잘 모르는 일본인에게 거짓말을 유포하는 경우가 다수 있기 때문에 가르친다.
倭王이 처음으로 宋에 책봉을 요청한 것은 438년 倭王珍에 의해서이다.
倭王珍은 「倭, 百濟, 新羅, 任那, 秦韓, 慕韓 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을 요청하지만,
6國에 관한 것은 기각되고 「安東大將軍」보다 낮은 「安東將軍」 倭國王에 책봉된다.
宋은 야마토가 한반도 남부에 대한 권력이 없다는 것을 이미 처음부터 대략적인 파악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倭王珍의 요청을 기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443년 倭王珍의 후임인 倭王濟에도 6國에 관한 것이 기각되지만,
451년에는 倭王濟의 재요청을 받아드려 「倭, 新羅, 任那, 加羅, 秦韓, 慕韓 六國諸軍事」「安東將軍」倭國王으로 책봉된다.
5國은 宋에게 조공하지 않는 관계 없는 나라이고 일본은 조공하는 나라이기 때문에 거짓말이라도 일본을 대우하여 요청을 받아드린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백제와는 사신이 통교하기 때문에 야마토의 거짓말이 통하지 않고 기각되었으며, 鎭東大將軍 百濟王으로 여전히 왜왕보다 높은 관작으로 대우된다.
그 이후 倭王武까지도 왜왕의 관작 요청은 계속되고, 「安東大將軍」으로 승격도 되지만,
마지막까지 백제에 관한 일본의 요청은 승인되지 않고, 백제왕보다는 낮은 관작으로 대우된다.
왜왕이 요청한 관직에는 자신이 실제로 지배하는 열도의 여러 나라에 대한 이름은 전혀 등장하지 않아, 관직에 있는 나라의 이름은 실재하는 지배력은 없고 소망하는 일을 담아둔 것일 뿐이라는 등의 다른 설명이 더 있지만 여기에서는 생략한다.
백제가 일본의 속국이라는 거짓말의 역사를 설파하는 일본인의 주장에 따르면,
자신의 요청이 거절되고 백제왕보다 낮은 대우를 받는 이런 외교적 굴욕은 당연히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백제가 일본에 통제되는 속국이라는 것은 거짓말이었기 때문에 왜왕의 요청은 번번이 거절당하고 백제왕보다 낮은 대우를 받았던 것이다.
그 다음, 신라는 당시 어떤 상황이었을까?
신라는 광개토대왕 이래로 400년부터 463년까지 고구려의 군대가 주둔하여 지배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왜왕은 한반도의 남부가 자신의 통제와는 관계없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고의로 거짓말했던 것이 증명된다.
그 당시 고구려의 신라 지배는 문헌 연구뿐만 아니라 고고학으로도 증명된다.
한반도 남부에는 그 당시에 세워진 고구려 비석이 두개 발견된다.


한개는 신라 북부이자 고구려 남부인 충청도 충주지역, 다른 한개는 신라의 수도 궁성 유적 내부에서 발견된 것이다.
비석에는 신라왕은 고구려 태왕과 태자에게 복속하며 신라의 영토내에 고구려 군대가 주둔한다. 라는 등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일본인의 주장은 일본인의 거짓말 선언으로 이루어져 있던 것이지만 고구려의 지배력은 실재하는 역사를 기록한 진짜의 역사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倭王이 중국에 한반도 남부의 군사권 관직을 요구한 것은 무엇이었던 것일까?
백제와의 외교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 혹은 열도 내부 선전용 등 설명에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확실한 것은,

에도시대에도 일본이 네덜란드에는 조선이 일본의 속국이라고 거짓말하고
조선에는 네덜란드가 일본의 속국이라고 거짓말하던 것과 같이
고대에도 부끄러운 거짓말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