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측 明의 수군 오른쪽 일본인
東萊府使殉節圖의 일부입니다
빨간 줄 안으로 왜군입니다

이 그림은 1613년에 제작된
東國新續三綱行實圖 김씨참두의 일부분
김씨 부인과 왜군
근대 일본의 사무라이 같습니다
헤어스타일 변함 없군요
당시 한국인과 일본인의 구별은 너무 쉬울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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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일본 학계에서 일본인는 동아시아의 여러 민족의 집단이거나
일본인과 고려인 한국인의 연합이거나 일본인과 중국인의 연합이라는 說이 나온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일본인의 구성원은 일본인과 동아시아 여러 지역의 사람들로 구성되었거나
일본인과 한국인 고려인 또는 일본인과 중국인의 연합세력 이라고 주장하고 있다고 합니다
귀찮기 때문에 일본인가 동아시아 여러 민족 집단이라는 說 중국인과 엽합이라는 說은 접어 두고
일본인과 고려인 한국인의 연합 세력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일본인의 활동을 보면 쌀 등 식량 약탈이나 사람들을 납치하는 군사적 행동이었습니다
일본의 주장대로 일본인가 일본인과 고려인 한국인의 연합 세력이라고 하면
여러 의문이 나옵니다
만일 일본인가 고려인 한국인 일본인의 연합 세력이라면 한반도에서 대마도나 일본 본토로
갈 수 있고 일본 본토에서 한반도로 갈 수 있습니다만
또 중국에서 조선을 거쳐 일본으로 갈 수 있을 것입니다만
일본인 침입의 경로를 보면 항상 일본에서 한반도로 향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또 일본인에 의한 약탈이나 납치의 피해자는 일본이나 고려 조선에서 同時多發的으로 일어나야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그러나 일본인의 침략에 피해를 입은 것은 항상 고려와 조선의
민중이었습니다
그리고 연합 세력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없었을까?
예를들면 연합세력의 조직 근거지 전투 작전의 이동 지휘
약탈한 물건을 나누는 방법
일본어와 조선어에 능숙한 지휘자 등
이런 문제가 발생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방법이 동원되었는지 역사적 기록을 근거로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까?
고려末 조선 초기에는 전국적으로 출몰하던 일본인 침략을 막기 위해 군사력을 동원하는 강경책과
항구를 개방하여 교역을 허락한 회유책을 사용하였습니다
고려의 군사 정책으로
1380년 화약제조에 성공한 崔茂宣이 금강 하구 진포에서 일본인를 격퇴하였고
李成桂는 황산 일대에서 阿只拔都가 이끄는 일본인를 섬멸하였다
1389년 100척의 병선을 동원하여 일본인의 근거지 대마도를 정벌하였는데 이것이 1차 대마도
정벌이었고 이후에는 한반도에서 일본인의 활동은 쇠락해졌다
그러나 조선이 건국되자 일본인는 또 다시 소란을 피우기 시작하였다
조선 太祖는 1392년 승려 각추(覺鎚)를 무로마치 막부에 보내고 일본인 금지 요청을 하였다
1394년 7월 규슈의 실력자 今川了俊은 조선에 일본인 금지 약속을 하고 한국인 포로 659명을
송환하였다
일본으로 사신을 보내고 일본인 금지 요청을 하며 포로 수백명을 데리고 온 것은 고려시대에도
있었던 일입니다
추측이지만
일본 학계에서 일본인는 일본인과 고려 한국인의 연합 세력이라는 주장의 근거로
일본에서 고려 조선을 침략한 일본인 중에 납치를 당했던 고려인이나 한국인이 섞여 있었을
가능성을 제기했는지 모릅니다만
이런 논리라면
임진왜란 당시에 조선군으로 귀화한 일본군을 예를들어 임진왜란은 일본군과 조선군의 연합 세력이
일본군과 전투한 전쟁이라고 하는 논리와 같습니다 따라서 전혀 설득력 없습니다
고려나 조선의 중앙 정권으로 부터 관리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해상 세력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만약 조선에서 일본인과 연합한 강력한 해상 세력이 있었다고 한다면
고려와 몽골 연합군의 2회에 걸친 일본 침략 시기에는 고려는 일본인 공백기였다는 것
1419년 조선의 李從茂의 대마도 정벌 이후에는 일본인의 활동이 급격하게 감소하였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左側 明の水軍右側倭寇
東莱府使殉節図の一部です
赤い竝び中に倭軍です

が絵は 1613年に製作された
東国新続三綱行実図 ギムシチァムドの一部分
金さん奥さんと倭軍
近代日本のさむらいみたいです
ヘアスタイル相変わらずですね
当時朝鮮人と日本人の区別はとても易しいようです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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最近日本学界で倭寇は東アジアの多くの民族の集団や
日本人と高麗人朝鮮人の連合や日本人と中国人の連合という 説が出たようです
言わば倭寇の構成員は日本人と東アジア多くの地域の人々に構成されたとか
日本人と朝鮮人高麗人または日本人と中国人の連合勢力と主張していると言います
面倒だから倭寇が東アジア多くの民族集団という 説 中国人とヨブハブという 説は折っておいて
日本人と高麗人朝鮮人の連合勢力というのに対して考えて 見ましょう
倭寇の活動を見れば米など食糧掠奪や人々を 拉致する軍事的行動でした
日本の主張どおり倭寇が日本人と高麗人朝鮮人の連合勢力だと言えば
多くの疑問が出ます
もし倭寇が高麗人朝鮮人日本人の連合勢力なら韓半島で対馬島や日本本土で
行くことができるし日本本土から韓半島に行くことができますが
また中国で朝鮮を経って日本に行くことができるでしょう
倭寇侵入の経路を見ればいつも日本で韓半島に向けています
これは どんなに説明することができましょうか?
また倭寇による掠奪や拉致の被害者は日本や高麗朝鮮で 同時多発的に起きると
自然だろうしかし倭寇の侵略に被害を被ったことはいつも高麗と朝鮮の
民衆でした
そして連合勢力で発生する問題はなかっただろうか?
例えば連合勢力の組職足だまり戦闘作戦の移動指揮
掠奪した品物を分ける方法
日本語と朝鮮語に上手なコンダクターなど
こんな問題が発生するでしょう
それではこのすべての問題を解決するためにどんな方法が動員されたのか歴史的記録を根拠で
論理的に説明することができますか?
高麗末 朝鮮初期には全国的に出沒した倭寇侵略を阻むために軍事力を動員する強硬策と
港を開放して交易を承諾した懐柔策を使いました
高麗の軍事政策で
1380年火薬製造に成功した 崔茂宣が金剛河口ジンポで倭寇を撃退したし
李成桂は硫酸一帯で 阿只抜都が導く倭寇を殲滅した
1389年 100尺の兵船を動員して倭寇の足だまり対馬島を征伐したがこれが 1次対馬島
征伐だったし以後には韓半島で倭寇の活動は衰落された
しかし朝鮮が建国されると倭寇は再び騒ぎ立て始めた
朝鮮 太祖は 1392年僧侶角錘(覚鎚)を室町幕府に行かせて倭寇禁止要請をした
1394年 7月九州の実力者 今川了俊は朝鮮に 倭寇禁止約束をして朝鮮人虜 659人を
送還した
日本で使臣を送って倭寇禁止要請をして虜数百人を連れて来たことは高麗時代にも
あった 仕事です
推測だが
日本学界で倭寇は日本人と高麗朝鮮人の連合勢力という主張の根拠で
日本で高麗朝鮮を侵略した倭寇の中に拉致にあった高麗人や朝鮮人がまじていた
可能性を申し立てたのか分からないですが
こういう 論理なら
壬辰の乱当時に朝鮮軍で帰化した日本軍を例えば壬辰の乱は日本軍と朝鮮軍の連合勢力が
日本軍と戦闘した戦争だと言う論理のようですよって全然説得力ないです
高麗や朝鮮の中央政権から管理することができない位力強い海上勢力があったことも
なかったです
もし朝鮮で日本人と連合した力強い海上勢力があったと言ったら
高麗とモンゴル連合軍の 2回にわたった日本侵略時期には 煮こもうとする倭寇空白期だったということ
1419年朝鮮の 李従茂の対馬島 征伐以後には倭寇の活動が急激に減少したという事実を
どんなに説明することができますか?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