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井戶茶碗(조선 16세기)
16세기에 만든 조선의 막사발 하나가 있다.
참으로 볼품없고 못난 표정이다.
너무 못생겨서 어떤 이는 "개의 밥그릇같다"고 했다.
막돼먹은 생김새로 본다면 그말은 지나치지 않다.
요즘 누가 그런 그릇에 밥이나 국을 담겠는가?
지름이 15cm에 아래의 脚은 1cm 남짓이다. 높이는 기껏해야 8-9cm.
매혹적인 곳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한마디로 "薄色"이다.
그저 더러움이 묻어서 노란 것때문에 분청사기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출신은 그래도 "백자"이다. 하찮은 인간도 인간 축에 끼듯이
이 놈도 명색이 "백자"이다.
백자라고 해서 다 옥골은 아니다. 노란색 백자 사발은 상처투성이다.
유약이 골고루 묻지 않아 脚에는 흙의 입자가 드러나 있다.
눈물이라고 부르는 유약의 덩어리도 보기나쁘다.
열이 식을 때 부서진 듯 보이고 주둥이는 그나마 찌그러져있다.
가마에서 불순물이 묻었는지 주둥이 주변에 반점도 있다.
화장을 한번도 해본 적이 없는 시장의 村婦와 같은 모습이다.
그러나 "기자에몬 井戶茶碗(조선 16세기)"은 일본에서 천하 제일로 치는 ""高麗茶碗"이다.
호사가들은 300억원-400억원의 가치를 지닌다고 말한다.
그 가치를 제일 먼저 알아준 곳이 일본이다.
한국은 이 막사발에 대해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
井戶茶碗은16세기경에 임진왜란 이전에 만들어져 일본으로 넘어가 "茶碗"으로 사용되면서 "국보"로 지정된 밥그릇을 말한다.
이 茶碗은 임진왜란 이전 조선의 옛 晉州의 누군가가 만들었다고 추정할뿐 이름이 알려지진
않았다.
조선에서 이 막사발은 이가 빠지면 개의 밥그릇으로 사용된 것이라며 비하해서 부르기도 하지만
일반적인 명칭은 "조선 막사발", "晉州 사발"로 불려진다.
최근엔 "晉州 멧사발"로 제사를 드릴 때 음식을 담았던 "祭器"였다는 주장에 힘을 받고 있는 분위기다.
이 사발의 일본명은 "이도다완""井戶茶碗","황태옥사발","고려사발", "고려다완"등으로 불리워 정확한 명칭이 없어 "井戶茶碗","晉州사발"로 부르기로 한다.
이 사발의 고향은 영남지역 진주가 대세인 듯하다.
이 견해에 따라 이 사발은 옛 晉州지역에서 4-500년전에 만들어져 일본에 건너가 "대명물"이라는
극단적인 찬사를 받았다.
그 찬사의 이유는 "너무너무 평범하다"는 것이다. 종류가 적고 더 이상 나오지도 않아 희귀하다는 점에서도 세계에서 가장 비싼 다이아몬드에 비한다.
"오사까城과 바꾸지 않는다"고 말할만큼 엄청난 사발
"죽기 전에 참배하는 것이 소원"일 정도로 일본 茶人들의 관심은 대단하다.
특히 "기자에몬 오이도" 라고 불리는 대표적인 "이도다완"은 "도자기 神"이다.
일본 전국시대의, 織田信長(1522-82)는 막강한 적이었던 시바타 가츠이를 회유할 목적으로
이도다완을 선물해 그를 복속시킨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역사의 전쟁의 도구로 사용된 "조선사발"의 처음 등장이었고 이후 이도다완은 비약하여
"복속과 주종"의 관계를 설명하는 대명사로 등장한다.
豊信秀吉의 다도의 선생이고 승이며 일본 다도를 완성한 千利休에 의해 다도가 급속도로 확산되면서 고급 도자기의 수요는 폭증했다.
織田信長의 뒤를 이은 豊信秀吉의 유명한 다도회에서 무사들에게 보여준 茶器도 조선에서 온 다기
였다.
豊信秀吉도 織田信長처럼 회유를 위해 이도다완을 선물하는 책략을 쓰면서 "괴력"은 더해진다.
이 밖에 수많은 기록들이 있지만 이는 임진왜란 이전에 이도다완이 일본에 건너갔다는 것을 뜻하고
그 유명세의 역사를 입증하고 있을뿐이다.
이후, 豊信은 "사발 전쟁"이라는 임진왜란을 일으킨다.
임란 도중 일본은 특히 晉州를 비록한 경상남도 전역의 沙器匠을 "휩쓸었다"고 표현할 정도로
그 수에 있어서 엄청나다.
당시의 일본의 기록에 조선 沙器匠 1000명 정도응 유폐시킨 후 도자기를 굽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 제 6部隊라는 약탈부대를 편성해 도공을 포함한 인질10만명을 납치했다고 전해진다.
흔히 명치유신을 단행하는 힘이 되었다는 이 조선도공들의 흔적은 현재 일본 남쪽 큐슈 나리타
지역에 200개가 넘는 GAMA(도자기를 굽는 곳)가 잔존해 있고 유럽으로 수출하면서 도자기 시장을 차지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