扶余族は、5世紀後半ごろ渡来したようである。
扶余族の渡来については、K側から奈良百済などの表現がみられるが、話を聞くと進出したということであって征服したということではないということである。
ここでは、九州の竹原古墳の壁画と埼玉の吉見百穴をあげる。
竹原古墳の壁画
九州の横穴式石室の装飾古墳の分布を某ブログから拝借した。
鹿児島以外に広く分布している。
これら、横穴式石室のすべてが扶余族のものではないであろうが、墓などは民族のアイデンティティであり、扶余族を主とした集団での渡来があったと推察できる。
九州に渡来したあと、最終的には埼玉を安住の地としたようである。
埼玉の吉見百穴
埼玉の吉見百穴には、実際に行ったのであるが、出土品の剣なども展示してあったが、ネットにあげるのは不可とのことだったのでひかえる。
埼玉にはヒボコ勢力の雄略天皇系のさきたま古墳群があるが、それを牽制するために南側に扶余族、南西の秩父に高句麗滅亡時の移民(若光王)を配置したようである。
この扶余族が百済王族だったのかどうかだが、出雲の横穴式石室から百済の王冠が出土した。TVでみたが、その後画像を探すことはできなかった。
百済王冠の画像をあげる。
出雲といえば、イザナギノミコトの黄泉の国の神話があるが、ここから神話に採用されたのかもしれない。
これらの横穴式石室を残した渡来人が大和の中央豪族とどうかかわるのかだが、呉から渡来した水軍の安曇族(安部氏)など渡来人と関係をもったのは蘇我氏なので蘇我氏と関係があるのかもしれない。
なお、蘇我氏自体は武内宿祢を祖とするヒボコ族なので、蘇我氏自体が扶余系ということではないだろう。
부여족은, 5 세기 후반경 도래한 것 같다.
부여족의 도래에 대해서는, K측으로부터 나라 (쿠다라)백제등의 표현이 보이지만, 이야기를 들으면 진출했다고 하는 것이어 정복했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고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큐슈의 다케하라고분의 벽화와 사이타마의 요시미햐케츠를 준다.
다케하라고분의 벽화
큐슈의 횡혈식 석실의 장식고경의 분포를 모브로그로부터 빌렸다.
카고시마 이외에 넓게 분포하고 있다.
이것들, 횡혈식 석실의 모든 것이 부여족의 것은 아닐 것이다가, 무덤 등은 민족의 아이덴티티이며, 부여족을 주로 한 집단으로의 도래가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큐슈에 도래한 뒤, 최종적으로는 사이타마를 안주의 땅으로 한 것 같다.
사이타마의 요시미햐케츠
사이타마의 요시미햐케츠에는, 실제로 갔던 것이다가, 출토품의 검등도 전시되어 있었지만, 넷에 올리는 것은 불가라는 것이었으므로 기록한다.
사이타마에는 히보코 세력의 유랴크 천황계의 북고분군이 있다가, 그것을 견제하기 위해서 남쪽으로 부여족, 남서의 치치부에 고구려 멸망시의 이민(젊은 히카루왕)을 배치한 것 같다.
이 부여족이 (쿠다라)백제 왕족이었는가 어떤가이지만, 이즈모의 횡혈식 석실로부터 (쿠다라)백제의 왕관이 출토했다.TV로 보았지만, 그 후 화상을 찾을 수 없었다.
(쿠다라)백제 왕관의 화상을 준다.
이즈모라고 하면, 이자나기노미코트의 황천의 신화가 있다가, 여기로부터 신화에 채용되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횡혈식 석실을 남긴 도래인이 다이와의 중앙 호족과 어떨까 변하는지이지만, 오로부터 도래한 수군의 아즈미족(아베씨) 등 도래인과 관계를 가진 것은 소가씨이므로 소가씨와 관계가 있다 의 것인지도 모른다.
덧붙여 소가씨 자체는 타케우치숙이를 선조로 하는 히보코족이므로, 소가씨 자체가 부여계라고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