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句麗王の5代までは解氏だが、6代目からは高氏になった。
これは夫余との関係が変化したことが理由と考える。
5代目までは夫余と争っており、名目上夫余と同等の解氏を立てた。
しかし、夫余は遊牧民の攻撃を受けて弱体化し、6代目からは高句麗の属国のようになった。
こうなると、実質的に高句麗のほうが上なので、名目を立てる必要がなくなる。
この高氏はどこから来たかであるが、BC11世紀の高夷であるとの説がある。
以下、某サイトから抜粋
「『逸周書』に「王會弟五十九成周之會(省略)北方臺正東、高夷嗛羊、嗛羊者,羊而四角。獨鹿邛邛、邛邛善走者也。孤竹距虚。不令支玄豹。不屠何青熊。東胡黄羆。山戎戎菽,其西般吾白虎黑文」
上記は西周初年のB.C.1046年頃、周王朝の第2代の王で、2年で崩御した父の武王の後を継いで即位する周の成王が洛邑(洛陽)を創建後、諸侯を招いて大会を催したときの記事の抜粋ですが、ここに高夷の名が見えます。後世、孔潁達(唐代の学者、隋書を編纂)は、この王會篇を注釈して次のように記します。 「逸周書に記された会議に参加した北方台地の東の高夷とは、高句麗族の源流である」 高夷氏は山東省に登場する最古の部族で、大地に鵠(おおはくちょう)のトーテムを祀り、高夷族が中原に進入するのに従い、商代には河南省北部にまで勢力を拡大します。その一勢力が、中原から東北地方に移住し、後に高句麗を名乗ると述べています。
この解釈が史実であれば、高句麗の祖先は、B.C.11世紀、既に遼寧省に登場していたことになります。確かに戦国時代に高夷の領域とされていますが、両者ともトーテムは「鳥」です。高夷が山東省から北上して、高句麗が高夷の後裔となり、当時の朝鮮半島の主な源流となったのです。」
まあ、中国人学者や最後の文は、暴走しているが。
この高夷と箕族との関連はわからない。
ここで、高夷は名前のとおり、漢民族ではなく東夷族である。
しかも、のちに高句麗となる地に移住したのだから、民族史としては、朝鮮民族史となる。
再度、某サイトから抜粋する。
「『史記』匈奴列伝「百有余年後、趙襄子は匂山を越え、代国も破り、胡族と貉(らく)族に臨んだ。」後世の注記に、貉とは扶余濊なりとあります。 趙襄子は、晋の大臣として魏氏、韓氏とともに最大の実力者・知氏を滅ぼして晋を3分、そして戦国時代の幕を開いたとされる趙の建国者で、B.C.430年に死去します。 上記から戦国時代初期に、すでに穢系部族の貉が、斉に接する地にまで、勢力を有していたことが窺えます。戦国時代には燕が遼東地方に長城(遼東長城)を築き、秦王朝になって、それを増強していていますが、穢・發・高夷の領域にまでは進出していません。従って、彼らが燕や秦によって故地を追われることもありません。また、穢系部族が、当時の中国領土を侵したという記録もありません。徐々に人口が増加し、新たな開拓地が必要となり、穢系連合も各部族が新天地を求めて移住を始めますが、大規模な軍事的移動はないようでした。 そして、中原諸国の戦乱を横目にしながら、穢王の王統である扶余族は故地の吉林省から黒竜江省に留まり、その他の部族は新天地を求めて南下します。「貉族」は吉林省長春市周辺にもいましたが、吉林省梅河口周辺の「發」、遼寧省撫順市周辺の「高夷」を吸収し、秦時代には「扶余・高句麗」の領域になります。」
ここの、貉(らく)族というのは、狛族のことだろう。
つまり、高句麗とも言える。
また、高夷は、遼寧省撫順市周辺に移住したようである。
狛族は、高夷から王を出すことにし、高句麗となったというのが、自然な解釈だと思う。
最後に、東夷族である高夷は朝鮮民族史である。
高句麗領土の満州が中国になっても、満州の高句麗の歴史は朝鮮民族史であることと同じである。
고구려왕의 5대까지는 해씨이지만, 6대째에서는 고씨가 되었다.
이것은 부여와의 관계가 변화했던 것이 이유라고 생각한다.
5대째까지는 부여와 싸우고 있어 명목상부여와 동등의 해씨를 세웠다.
그러나, 부여는 유목민의 공격을 받아 약체화 해, 6대째에서는 고구려의 속국과 같이 되었다.
이렇게 되면, 실질적으로 고구려 쪽이 위이므로, 명목을 세울 필요가 없어진다.
이 고씨는 어디에서 왔는지이지만, BC11 세기의 고미개 민족이다라는 설이 있다.
이하, 모사이트로부터 발췌
「 「일주서」에 「왕회제 59성주지회(생략) 북방대정동, 고이양, 양자, 양이사각.독록, 선주자야.고죽거허.불령지현표.불도 무슨청웅.동호황비.산융융숙, 기서반오백호문」
상기는 니시 아마네 초년의 B.C.1046년경, 주왕조의 제2대의 왕으로, 2년에 붕어 한 아버지 무왕의 뒤를 이어 즉위 하는 주의 성왕이 낙읍(낙양)을 창건 후, 제후를 부르고 대회를 개최했을 때의 기사의 발췌입니다만, 여기에 고미개 민족의 이름이 보입니다.후세, 공영들(당대의 학자, 수서를 편찬)은, 이 왕회편을 주석 해 다음과 같이 적습니다. 「일주서에 기록된 회의에 참가한 북방 대지의 동쪽의 고미개 민족이란, 고구려족의 원류이다」고이씨는 산둥성에 등장하는 최고의 부족에서, 대지에 고(안녕 어조)의 토템을 모셔, 고이족이 중원에 진입하는데 따라, 상대에는 하남성 북부에까지 세력을 확대합니다.그 1 세력이, 중원에서 동북지방으로 이주해, 후에 고구려를 자칭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해석이 사실이면, 고구려의 조상은, B.C.11세기, 이미 랴오닝성에 등장하고 있던 것이 됩니다.확실히 전국시대에 고미개 민족의 영역으로 되어 있습니다만, 양자 모두 토템은 「새」입니다.고미개 민족이 산둥성에서 북상하고, 고구려가 고미개 민족의 후예가 되어, 당시의 한반도의 주된 원류가 되었습니다.」
뭐, 중국인 학자나 마지막 문장은, 폭주하고 있지만.
이 고미개 민족과 미족과의 관련은 모른다.
여기서, 고미개 민족은 이름대로, 한민족은 아니고 동부지역 무사족이다.
게다가, 후에 고구려가 되는 땅에 이주했으니까, 민족사로서는, 조선 민족사가 된다.
재차, 모사이트로부터 발췌한다.
「 「사기」흉노 열전 「백 년 남짓 후, 조 노보루자는 내산을 넘어 대국도 찢어, 호족과 맥(들 구) 족에 임했다.」후세의 주기에, 맥과는 부여든지와 있어요. 衍嶪아이는, 진의 대신으로서 위씨, 한씨와 함께 최대의 실력자·사토루씨를 멸해 진을 3분 , 그리고 전국시대의 막을 열었다고 여겨지는 조의 건국자로, B.C.430해에 사망합니다. 상기로부터 전국시대 초기에, 벌써 예계 부족의 맥이, 제에 접하는 땅에까지, 세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엿볼 수 있습니다.전국시대에는 제비가 랴오둥 지방에 장 시로(랴오둥장 시로)를 쌓아, 진왕조가 되고, 그것을 증강하고 있고 있습니다만, 예·발·고미개 민족의 영역에까지는 진출하고 있지 않습니다.따라서, 그들이 제비나 진에 의해서 고지를 쫓기기도 없습니다.또, 예계 부족이, 당시의 중국 영토를 침범했다고 하는 기록도 없습니다.서서히 인구가 증가해, 새로운 개척지가 필요해, 예계 연합도 각부족이 신천지를 요구해 이주를 시작합니다만, 대규모 군사적 이동은 없는 것 같았습니다.그리고, 중원 제국의 전란을 곁눈질로 하면서, 예왕의 왕통인 부여족은 고지의 지린성에서 흑룡강성으로 머물어, 그 외의 부족은 신천지를 요구해 남하합니다.「맥족」은 지린성 창춘시 주변에도 있었습니다만, 지린성매화 하구 주변의 「발」, 랴오닝성무순시 주변의 「고미개 민족」을 흡수해, 진시대에는 「부여·고구려」의 영역이 됩니다.」
여기의, 맥(들 구) 족이라고 하는 것은, 박족일 것이다.
즉, 고구려라고도 말할 수 있다.
또, 고미개 민족은, 랴오닝성무순시 주변에 이주한 것 같다.
박족은, 고미개 민족으로부터 왕을 꺼내기로 해, 고구려가 되었다는 것이, 자연스러운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동부지역 무사족인 고미개 민족은 조선 민족사이다.
고구려 영토의 만주가 중국이 되어도, 만주의 고구려의 역사는 조선 민족사인 것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