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朝鮮と言う(のは) 前漢-後漢や 唐-後唐と一緒に, 近世の朝鮮と古代の朝鮮を区分するために後代に作られた歴史用語で, 古朝鮮も当時には, 朝鮮 とだけ呼称された国だ. 古朝鮮には檀君朝鮮,箕子朝鮮,衛満朝鮮で 三朝鮮があるのに, 三国遺事では檀君朝鮮と 箕子朝鮮を古朝鮮, 衛満朝鮮を朝鮮だと呼称, 帝王韻紀では檀君朝鮮を 前朝鮮, 箕子朝鮮を 後朝鮮と称しているが, 朝鮮時代から現代までは 三の古代朝鮮を皆古朝鮮, 近世の朝鮮を朝鮮だと称するようになる.
歴史には実際あった事件を記録した歴史とどんな話を事実だと信じて来た歴史がある. 高麗時代と朝鮮時代に檀君は開国の君主, 箕子は教化の君主で実存として仕えられていたし, 衛満は最初の逆賊で重要視されなかった.高句麗でも 日神, 扶余神,高登神 以外にも 霊星神, 可汗神, 箕子神 などの 多神を崇拜したという記録を見れば, 高麗時代と朝鮮時代だけでなく, 高句麗時代にも 箕子は仕えられていたことと見える.しかし韓国の上古史に対する現代的歴史研究が開始された以来檀君朝鮮と 箕子朝鮮の実体に対する多い疑問が申し立てられた.
集安市 角抵塚 高句麗壁画 (A.D.5世紀)
嶺市 平崗地区 出土古朝鮮遺物 (B.C.2世紀)
檀君神話は, 上古時代の ye族は虎, mek族は熊を崇拜したという記録を根拠で ye族と mek族が天孫族を中心に建国される過程が神話化になったことだという漠然たる分析と神話の象徴である虎, 熊, 斧折, 空の現われる跡が考古学籍で一部発見されていて, 神話自体は 三国遺事 著述以前である古代にも存在していたという暗示は存在するが, 檀君王倹という人物に対する歴史的な実体に対しては立証されない.
箕子東来に対しても, 記録は檀君神話より明らかだが同じく研究によってその歴史的実体が不正されている.
考古学籍で B.C.11世紀の 遼東と平壌は腰下文明が中心に中国係が渡来したという跡は発見されない. 箕侯 青銅器が 遼西で発見されたことを根拠で 箕子朝鮮が 遼西にあったという主張もあるが, 箕侯 青銅器は 遼西 以外にも 山東, 安陽, 洛陽, 河南 など 華夏 全域で発見されることで, 箕侯 青銅器が発見された 遼西の南部は考古学籍でも文献的に 孤竹があった場所で 箕子朝鮮の実体の証と考えられることができない.
文献的でも 箕子朝鮮の実体を否定する根拠は相当だ. 箕子の 朝鮮東来 記録が現われ始める文献は 前漢代の尚書大典と, 後漢代の 漢書で, 先秦時代の文献である 竹書紀年,尚書,論語には 箕子が朝鮮に行ったという言及は一切の現われないし, 周で生を終えたという言及だけだ.
司馬遷の 史記で 箕子と 朝鮮を連結すると思われる 「乃封箕子於朝鮮而不臣也」というただ1行の文章が存在するのにこの文章は 「箕子を 朝鮮に 封しましたが臣下になることを拒否した.」と解釈されて来たが, それは誤読で 「朝廷で箕子を 封したが高潔で臣下にならなかった.」と解釈されることが正しいということが衆論だ. 史記の他の文章では 箕子が朝鮮ではなく相変らず 周王の近くで住んでいたという言及が現われて, 史記の 朝鮮列伝にも 箕子が朝鮮に行ったという記録が現われないということを考慮すれば文章が 箕子の 朝鮮東来と解釈することができないというのだ.
箕子の 朝鮮東来 話は 先秦時代までは存在しなかったが, 前漢代に作り出されたのが伝来されて朝鮮時代まで 史実として思われたのだ. 話創作の主体に対しては 漢で作り出されて朝鮮に伝来されたという 説と, 朝鮮で作り出されて 漢に伝来されたという 説で変わる. 朝鮮で作り出されたという 説では朝鮮が 箕子の子孫という名分を作って 華夏 地域を侵略したというのだ. (朝鮮-燕 戦争) 創作した主体が誰がされたといってもこのような研究によって 箕子の 朝鮮東来の歴史的実体は不正されている.
箕子の 朝鮮東来の歴史的実体が不正されても, 衛満 以前にも朝鮮という国が存在したと言う実体は不正されない. 現代学界では 衛満 以前の準王の朝鮮を 韓氏朝鮮で 命名とある. 「詩経」と 「潜夫論」に 衛満 以前の朝鮮王の氏姓は 韓氏だったという記録が存在する. 出典 : 潜夫論,「昔周宣王亦有韓侯其国也近燕其後韓 西亦姓韓衛満所伐遷居海中」,「昔の 周宣王の時代にもう一つの 韓侯があったが, その 国は 燕に近かった. その後 韓西の氏姓も 韓だったが, 衛満に攻撃されて海を通じて移住して暮した.」
付言で日本の wiki, ユティユブ, 書籍などで韓国で 箕子は単純に民族主義によって不正されて檀君神話が神話ではなく歴史の事実だと韓国の歴史教科書で教えるというデマがよほど広がっていることが確認されるのにそれは悪意的な歪曲によるデマだ. 時事版に 1‾7次国史教科書をあげて確認しておいたがこちらには敢えてあげない.
고조선이란 前漢-後漢이나 唐-後唐과 같이, 근세의 조선과 고대의 조선을 구분하기 위해 후대에 만들어진 역사 용어로, 고조선도 당시에는, 朝鮮 이라고만 호칭되었던 나라이다. 고조선에는 단군조선,箕子朝鮮,衛滿朝鮮으로 三朝鮮이 있는데, 三國遺事에서는 단군조선과 箕子조선을 고조선, 衛滿조선을 조선이라고 호칭, 帝王韻紀에서는 단군조선을 前朝鮮, 箕子朝鮮을 後朝鮮으로 호칭하고 있으나, 조선시대부터 현대까지는 三의 고대 조선을 모두 고조선, 근세의 조선을 조선이라고 호칭하게 된다.
역사에는 실제 있었던 사건을 기록한 역사와 어떤 이야기를 사실이라고 믿어왔던 역사가 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단군은 개국의 군주, 箕子는 교화의 군주로 실존으로서 모셔지고 있었고, 衛滿은 최초의 역적으로 중요시 되지는 않았다. 고구려에서도 日神, 扶餘神, 高登神 이외에도 靈星神, 可汗神, 箕子神 등의 多神을 숭배했다는 기록을 보면,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뿐만 아니라, 고구려 시대에도 箕子는 모셔지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한국의 상고사에 대한 현대적 역사 연구가 개시된 이래 단군조선과 箕子朝鮮의 실체에 대한 많은 의문이 제기되었다.
集安市 角抵塚 고구려 벽화 (A.D.5세기)
鉄嶺市 平崗地區 출토 고조선 유물 (B.C.2세기)
단군신화는, 상고시대의 ye族은 호랑이, mek族은 곰을 숭배했다는 기록을 근거로 ye族과 mek族이 천손族을 중심으로 건국되는 과정이 신화화 된 것이라는 막연한 분석과 신화의 상징인 호랑이, 곰, 박달나무, 하늘이 나타나는 흔적이 고고학적으로 일부 발견되고 있어, 신화 자체는 三國遺事 저술 이전인 고대에도 존재하고 있었다는 암시는 존재하지만, 단군왕검이라는 인물에 대한 역사적인 실체에 대해서는 입증되지 않는다.
箕子東來에 대해서도, 기록은 단군신화보다 뚜렷하지만 마찬가지로 연구에 의해 그 역사적 실체가 부정되고 있다.
고고학적으로 B.C.11세기의 遼東과 평양은 요하문명이 중심으로 중국계가 도래했다는 흔적은 발견되지 않는다. 箕侯 청동기가 遼西에서 발견된 것을 근거로 箕子朝鮮이 遼西에 있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箕侯 청동기는 遼西 이외에도 山東, 安陽, 洛陽, 河南 등 華夏 전역에서 발견되는 것이고, 箕侯 청동기가 발견된 遼西의 남부는 고고학적으로나 문헌적으로 孤竹이 있었던 장소로 箕子朝鮮의 실체의 증거라고 생각될 수 없다.
문헌적으로도 箕子朝鮮의 실체를 부정하는 근거는 상당하다. 箕子의 朝鮮東來 기록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문헌은 前漢代의 尙書大典과, 後漢代의 漢書로, 先秦時代의 문헌인 竹書紀年, 尙書, 論語에는 箕子가 朝鮮에 갔다는 언급은 일체 나타나지 않으며, 周에서 생을 마쳤다는 언급 뿐이다.
司馬遷의 史記에서 箕子와 朝鮮을 연결한다고 여겨지는 「乃封箕子於朝鮮而不臣也」이라는 단 한줄의 문장이 존재하는데 이 문장은 「箕子를 朝鮮에 封하였지만 신하가 되는 것을 거부했다.」라고 해석되어 왔지만, 그것은 오독으로 「朝廷에서 箕子를 封하였으나 고결하여 신하가 되지 않았다.」라고 해석되는 것이 올바르다는 것이 중론이다. 史記의 다른 문장에서는 箕子가 조선이 아니라 여전히 周王의 근처에서 살고 있었다는 언급이 나타나며, 史記의 朝鮮列傳에도 箕子가 조선으로 갔다는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을 고려하면 문장이 箕子의 朝鮮東來라고 해석할 수 없다는 것이다.
箕子의 朝鮮東來 이야기는 先秦時代까지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前漢代에 창작된 것이 전래되어 조선시대까지 史實로서 여겨졌던 것이다. 이야기 창작의 주체에 대해서는 漢에서 창작되어 조선으로 전래됐다는 說과, 조선에서 창작되어 漢으로 전래됐다는 說으로 갈린다. 조선에서 창작되었다는 說에서는 조선이 箕子의 후손이라는 명분을 만들어 華夏 지역을 침략했다는 것이다. (조선-燕 전쟁) 창작한 주체가 누가되었든 이러한 연구에 의해 箕子의 朝鮮東來의 역사적 실체는 부정되고 있다.
箕子의 朝鮮東來의 역사적 실체가 부정되더라도, 衛滿 이전에도 조선이라는 나라가 존재했다고 하는 실체는 부정되지 않는다. 현대 학계에서는 衛滿 이전의 準王의 조선을 韓氏朝鮮으로 命名하고 있다. 「詩經」과 「潛夫論」에 衛滿 이전의 조선왕의 성씨는 韓氏였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出典 : 潛夫論,「昔周宣王亦有韓侯其國也近燕其後韓西亦姓韓為衛滿所伐遷居海中」,「옛날 周宣王의 시대에 또다른 韓侯가 있었는데, 그 國은 燕에 가까웠다. 그 후 韓西의 성씨도 韓이었는데, 衛滿에게 공격되어 바다를 통해 이주하여 살았다.」
첨언으로 일본의 wiki, 유튜브, 서적 등으로 한국에서 箕子는 단순히 민족주의에 의해 부정되고 단군신화가 신화가 아니라 역사의 사실이라고 한국의 역사 교과서로 가르친다는 유언비어가 상당히 퍼져있는 것이 확인되는데 그것은 악의적인 왜곡에 의한 유언비어이다. 시사판에 1~7차 국사 교과서를 올려서 확인해놨지만 이곳에는 굳이 올리지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