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

기지마을 여성 김·젼쟈의 증언 「인신매매를 당해 매일 저녁 울면서 미국 병사를 받아 들였다」


1970년대, 동두천(톤두톨)의 기지마을 사진


http://img.hani.co.kr/imgdb/japan/news/resize/2014/0705/140455460653_20140705.jpg

「 나는 김·젼쟈입니다.금년에 64세입니다.오늘은 반드시 말해 두고 싶은 이야기가 있고, 이와 같이 인터뷰에 나왔습니다.나는 미군 전용의 위안부였습니다.
기지마을에 인신매매되고, 일생을 미군에 나누어주어지고 무념에 살아 왔습니다만, 아무도 우리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자발적으로 그 일을 했다고 색안경을 써.
우리가 미군으로부터 번 달러로, 한국을 다시 이와 같이 세웠는데 , 그 때는 우리에게‘애국자’라고 말했습니다만 , 지금 국가는 우리를 보고 보지 않는 후리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연로하고 병에 걸리고 있습니다.나의 동료가 점점 죽어 구의 것을 입다물고 보고는 있을 수 없습니다.그래서 용기를 내기로 했습니다.

우리는 국가를 상대에게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시작했습니다.우리가 왜 국가에 이러한 싸움을 거는지, 나의 인생을 통해서 설명하고 싶습니다.」
나는 1950년 1월에 태어났습니다.진짜의 아버지는 군인으로 해 망 해, 어머니는 재혼했습니다.내가 12세, 나의 의부는 어머니의 없을 때에 나를 강간했습니다.의형들도 나를 강간했습니다.
16세 때가를 나왔습니다.나의 초등학교때의 친구가 있었습니다.돈을 벌 수 있는 곳이 있다.방직 공장이라고 말했습니다.서울역으로부터 친구를 대해 갔습니다만 무엇인가 이상합니다.

친구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아줌마가 나타났습니다.너의 친구가 빚을 갚지 않고 도망쳤으므로, 너가 돌려주라고 했습니다.버는 방법은 언니가 가르친다고 했습니다.
미군 기지의 주변에서 여자들이 몸을 파는 곳이었습니다.고용주가 진정제를 주었습니다.나는 그 약이 무엇인가도 알지 못하고, 계속 마셨습니다.마약 세코나르와 알지만 뒤늦음이었다.
빚을 갚을 수 있다고 생각, 일을 하게 된다.그러나 현실 빚은 계속 증가했습니다.방세와 화장품·미용실대와 세코나르대를 지불하면, 아무리 일해도 돌려줄 수 없습니다.
보통, 기지마을 여성들은 하룻밤에 미군병을 3, 네 명씩 받아 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케이스가 보통이었다.그러면, 음부가 얼마나 아플까 모릅니다.
돈은 전부 아줌마가 가지고 가 버립니다.1~2개월에 빚을 모두 돌려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만 그렇게는 가지 않습니다.

그런 식으로 여성들은, 아니 10대의 아이들은, 밤새도록 울고, 밤새도록 미국 병사의 노리게(장난감)가 되어 고통에도가 있었다.
도망칠 수 없었습니다.일하러 갈 때, 언제나 남자(고용주아래에서 일하는 고로키)를 붙여 감시합니다.
안전한 성 관계는 기지마을 여성들에게는 보장되어 있지 않았다.어느A 미국 병사는 콘돔을 붙이지 않고로 합니다.우리에게는 거절할 수 없습니다.낙태도 정말로 많이 했습니다.
타한 아이만으로 17명입니다.보건소에는 고용주인이 끌어들여서 갔다.장까지 모두 도려내지는 고통에 참고, 낙태 수술에 참았다.
몸이 맞은 것처럼 아파, 그런데도 다시 일하러 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하루 쉬면 빚이 어느 정도 증가하는지도 몰랐다.

우리에게는 국가는 없었습니다.아니, 국가는 있었다.미군에 성 접대를 잘 하라고 교육하는 국가는 있었다.슬라이드를 이용하고, 성병에 대해 설명했다.
서비스를 더 많이 해 주세요.그러면 동두천에 미국 병사들이 더 옵니다.한국도 부자가 되며 살아 가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군수는 우리에게 달러를 버는 애국자와 칭찬해 칭했습니다.동두천에 기숙사를 만들면 공무원들이 설명했습니다.나이를 먹으면 살 수 있으면 군수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토지를 사 있으면.그러니까 열심히 달러를 벌라고.우리는 늙어도 갈 곳이 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하지만 약속을 지켜진 것은 하나나 있습니다.
고용주는 우리가 번 돈으로 집도 사, 토지도 샀지만.어느A 악명 높은 고용주는 다음에 경기도 의원이 되었습니다.

성병에 걸리면 그 자리에서 연행됩니다.페니실린을 맞았습니다.쇼크로 죽은 사람도 있습니다.맞으면 걸을 수 없습니다.엉덩이의 근육이 굳어지고, 다리가 끊어질 것 같게 됩니다.
그것을 이틀에 1회 맞읍니다.너무나 괴로워서 옥상으로부터 떨어져 죽은 언니도 해, 반 기분이 이상해진 언니도 있었습니다.나는 2주간 넣을 수 있어 나왔습니다.

너희를 좋아하고 기지마을 생활을 했는데 무엇이 불만인가, 그러한 질문을 정말로 많이 (듣)묻습니다.한국 정부가 미군을 끌어 들이지 않았으면, 우리가 이와 같이 되었는지요?
나중에 알았습니다만, 성 매매 행위는 법률로 금지되고 있었습니다.미군 기지마을에서만 성 매매가 합법이었습니다.박정희정부가 왜 그러한 법을 만들었는지요.
미군을 쭉 있게 하기 위해서 그처럼 한 것은 아닐까요?우리에게 달러를 벌게 하려고.

한겨레 2014.07.05  
http://japan.hani.co.kr/arti/politics/17752.html


미군 위안부 집단소송 관련 기사가 나왔으므로


UP 합니다.


양심적 도덕적 한국인의 여러분은, 필시 한국 정부


에 대해격노라고 생각합니다.



基地村女性キム・ジョンジャの証言「人身売買に遭い毎晩泣きながら米兵を受け入れた」

基地村女性キム・ジョンジャの証言「人身売買に遭い毎晩泣きながら米兵を受け入れた」


1970年代、東豆川(トンドゥチョン)の基地村写真


http://img.hani.co.kr/imgdb/japan/news/resize/2014/0705/140455460653_20140705.jpg

「私はキム・ジョンジャです。今年で64歳です。今日は必ず言っておきたい話があって、このようにインタビューに出て来ました。私は米軍向けの慰安婦でした。
基地村に人身売買されて、一生を米軍にあてがわれて無念に生きてきましたが、誰も私たちの話を聞こうとしませんでした。自発的にその仕事をしたと色眼鏡をかけて。
私たちが米軍から稼いだドルで、韓国をこのように立てなおしたのに、その時は私たちに‘愛国者’と言っていましたが、今国家は私たちを見て見ぬフリをしています。
私たちは年老いて病気にかかりつつあります。私の同僚がだんだん亡くなってくのを黙って見てはいられません。それで勇気を出すことにしました。

私たちは国家を相手に損害賠償請求訴訟を始めました。私たちがなぜ国家にこのような戦いを挑むのか、私の人生を通じて説明したいと思います。」
私は1950年1月に生まれました。実の父は軍人でし亡し、母は再婚しました。私が12才、私の義父は母の居ない時に私を強 姦しました。義理の兄たちも私を強 姦しました。
16歳の時家を出ました。私の小学校の時の友人がいました。金を稼げる所がある。紡織工場だと言いました。ソウル駅から友達について行きましたが何か変なのです。

友達は帰って来ませんでした。おばさんが現れました。お前の友達が借金を返さずに逃げたので、お前が返せと言いました。稼ぎ方は姉さんが教えると言いました。
米軍基地の周辺で女たちが身を売る所でした。抱え主が鎮静剤をくれました。私はその薬が何かも知らず、飲み続けました。麻薬セコナールと知るが手遅れだった。
借金を返せると思い、仕事をすることになる。しかし現実借金は増え続けました。部屋代と化粧品・美容院代とセコナール代を払うと、いくら仕事しても返せません。
普通、基地村女性たちは一晩に米軍兵を三,四人ずつ受け入れなければならないケースが普通だった。そうすれば、陰部がどれほど痛むかわかりません。
お金は全部おばさんが持って行ってしまいます。1~2ヶ月で借金を全て返せると思っていましたがそうは行きません。

そんな風に女性たちは、いや10代の子供たちは、夜通し泣いて、夜通し米兵のノリゲ(おもちゃ)になって苦痛にもがいた。
逃げることはできませんでした。仕事に行く時、いつも男(抱え主の下で働くゴロツキ)を付けて監視します。
安全な性関係は基地村女性たちには保障されていなかった。ある米兵はコ ンドームをつけずにします。私たちには拒絶できません。堕胎も本当にたくさんしました。
堕ろした子だけで17人です。保健所には抱え主が引っ張って行った。腸まで全てえぐられるような苦痛に耐えて、堕胎手術に耐えた。
からだが殴られたように痛み、それでも再び仕事に行か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一日休めば借金がどのくらい増えるのかも分からなかった。

私たちには国家はありませんでした。いや、国家はあった。米軍に性接待をうまくしろと教育する国家はあった。スライドを利用して、性病について説明した。
サービスをもっとたくさんしてください。そうすれば東豆川に米兵たちがもっと来ます。韓国も金持ちになって暮らしていかないといけないでしょう。
郡守は私たちにドルを稼ぐ愛国者と褒め称えました。東豆川に寮を作ると公務員たちが説明しました。年を取ったら暮らせると郡守がそう言いました。
土地を買ってあると。だから熱心にドルを稼げと。私たちは老いても行くところがあると信じていました。だが約束が守られたのは一つもありません。
抱え主は私たちが稼いだお金で家も買い、土地も買ったけれど。ある悪名高い抱え主は後で京畿道議員になりました。

性病に罹ればその場で連行されます。ペニシリンを打たれました。ショックでしんだ人もいます。打たれれば歩けません。お尻の筋肉が固まって、脚が切れそうになります。
それを二日に一回打たれるんです。あまりに苦しくて屋上から落ちてしんだ姉さんもいたし、半分気がおかしくなった姉さんもいました。私は2週間入れられて出てきました。

お前たちが好きで基地村生活をしたのに何が不満か、そのような質問を本当に多く聞きます。韓国政府が米軍を引き込まなかったら、私たちがこのようになったでしょうか?
後で知ったのですが、性売買行為は法律で禁止されていました。米軍基地村だけで性売買が合法でした。朴正熙政府がなぜそのような法を作ったのでしょうか。
米軍をずっと居させるためにそのようにした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私たちにドルを稼がせようとして。

ハンギョレ新聞 2014.07.05  
http://japan.hani.co.kr/arti/politics/17752.html


米軍慰安婦集団訴訟関連記事が出たので


UPします。


良心的道徳的韓国人の皆さんは、さぞかし韓国政府


に対し怒り心頭だと思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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