印は普通一度受けて後代に親譲りして,
送る方でも受ける方でも王朝が入れ替えされればまた下賜する.
そして新たに下賜する時には既存の 印は返る.
1.
名前をわからない 奴国王が A.D.57年に, その後 A.D.238年に卑ケフ呼が 印を受ける.
奴国王で卑ケフ呼, 漢で 魏 両方皆入れ替えされたので新たに受けたはずだ.
ところでその間にある A.D.107年 倭国王 帥升に対しては 金印を新たに受けたという記録が見えない.
単純に省略されたことかも知れないが, 帥升が邪馬台国の 王だったら 倭の主導権を認められるために 金印を受けようと思ったはずで,
奴国とは系統だけでなく地域も他の王朝だから 金印 下賜記録が省略された可能性より記録が残った可能性が高い.
帥升が邪馬台国の 王で 金印は受け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ことなら, 帥升の朝貢が記録で残ったことが自然ではなくなる.
そうだから記録がないということは 帥升が 奴国の王だったという情況で見られる思う.
2.
東夷伝の敍述をよく見れば,
後漢書の敍述では 倭の国々は皆が各各王を称して, 奴国が独自的に使臣を派遣して 金印を受ける.
しかし三国志の敍述では各自が王を称するという内容は消えて, 伊都国, 狗奴国, 女王国の王は見えるが, 奴国には王は見えないで女王国で派遣された管理によって統治されている. 海外に使臣を派遣していることも女王国単独で現われる.
卑ケフ呼時代の時点で 奴国の王朝はもう消えた状態というのが分かる.
スレッド初めに 印を新たに下賜する時には既存の 印は返ると言った.
しかし 奴国王の 金印は返却されなかったし福岡の土中で発見された.
奴国が平和的に降伏したことなら次期勢力に 金印を譲渡したがそうではなかったのだ.
宝物が古墳ではなく野地で出土されたということは百済金銅大香炉の場合と似たり寄ったりだ.
百済金銅大香炉と一緒に奴国王金印も首都が陷落されて急に地の中に隠しておいたことを取り戻すことができなかった情況だと思うことができる.
奴国の王朝は 倭国大乱 前後に軍事的に滅ぼされたのだ.
そして 金印 出土隣近は遺跡地でもなくて 金印以外他の遺物は出土されないことと知られている.
そうだということは 金印の発見された所が 奴国 首都所在地ではないという話であるでしょう. 他の所で逃走する途中に埋めたはずだ.
yoshinogariで福岡を通じて海で逃走しようとしていたのではないか思う.
印은 보통 한번 받고 후대에 대물림하며,
보내는 쪽이든 받는 쪽이든 왕조가 교체되면 다시 하사한다.
그리고 새로 하사할 때에는 기존의 印은 반납한다.
1.
이름을 알 수 없는 奴國王이 A.D.57년에, 그 후 A.D.238년에 히미코가 印을 받는다.
奴國王에서 히미코, 漢에서 魏 양쪽 모두 교체됐으므로 새로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사이에 있는 A.D.107년 倭國王 帥升에 대해서는 金印을 새로 받았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단순히 생략된 것일 수도 있지만, 帥升이 邪馬臺國의 王이었다면 倭의 주도권을 인정받기 위해 金印을 받으려고 했을 것이고,
奴國과는 계통 뿐만 아니라 지역도 다른 왕조이기 때문에 金印 하사 기록이 생략됐을 가능성보다 기록이 남았을 가능성이 높다.
帥升이 邪馬臺國의 王이고 金印은 받지 못한 것이라면, 帥升의 조공이 기록으로 남은 것이 자연스럽지 않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기록이 없다는 것은 帥升이 奴國의 왕이었다는 정황으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2.
동이전의 서술을 살펴보면,
후한서의 서술에서는 倭의 나라들은 모두가 각자 왕을 칭하고, 奴國이 독자적으로 사신을 파견해서 金印을 받는다.
하지만 삼국지의 서술에서는 각자가 왕을 칭한다는 내용은 사라지고, 伊都國, 狗奴國, 여왕국의 왕은 보이지만, 奴國에는 왕은 보이지 않고 여왕국에서 파견된 관리에 의해 통치되고 있다. 해외에 사신을 파견하고 있는 것도 여왕국 단독으로 나타난다.
히미코 시대의 시점에서 奴國의 왕조는 이미 사라진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스레드 처음에 印을 새로 하사할 때에는 기존의 印은 반납 한다고 했다.
하지만 奴國王의 金印은 반납되지 않았고 후쿠오카의 땅속에서 발견됐다.
奴國이 평화적으로 항복했던 것이라면 차기 세력에게 金印을 양도 했었겠지만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보물이 고분이 아니라 야지에서 출토됐다는 것은 百濟金銅大香爐의 경우와 유사하다.
百濟金銅大香爐와 같이 奴國王金印도 수도가 함락되어 급하게 땅 속에 숨겨놓은 것을 되찾지 못한 정황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奴國의 왕조는 倭國大亂 전후에 군사적으로 멸해졌던 것이다.
그리고 金印 출토 인근은 유적지도 아니고 金印 이외 다른 유물은 출토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는 것은 金印이 발견된 곳이 奴國 수도 소재지는 아니라는 이야기일 것이다. 다른 곳에서 도주하는 도중에 묻었을 것이다.
yoshinogari에서 후쿠오카를 통해 바다로 도주하려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