以下のような説がある。
「まず、第一に論衡に、解慕漱はでてこない。
なので、解慕漱は、三国史記の時代までに創作されたと考えられる。
では、解慕漱を創作したのは誰なのか。
百済の有力氏族:解氏であろう。
解氏は、自らの出自を高めるために解慕漱を創作した。」
では、夫余の東明王の出自の橐離国は、やはり、論衡どおりに北方にあったのではないか。
夫余の前身はワイである。
このワイ人は、じつに良い人々である。
規律正しく、自然道にそって生きていた。
しかし、ワイ人は島国で生きるにはいいだろうが、大陸で生き残れるとは思えない。
事実、匈奴と漢の抗争でワイは漢に下った。
しかし、東明王以来、ワイは夫余に変わり変身した。
遊牧民は、定着民とくらべて活動範囲が広く、外の情報にも接している。
なので、外交・政治には向いている。
なので、建前は捨てて、用心棒的に遊牧民の王を立てたと思う。
唐の王族は遊牧民の鮮卑であり、清の王族は女真である。
しかし、それらは消え、漢民族だけが残った。
夫余でも同様に朝鮮民族だけが残ったのだろう。
あと、背景として、夫余ではなく高句麗であるが、地方の地縁的集団が代表者を中央に置き、五奴部による中央集権が確立していった。
それに王が乗ったのだろう。
夫余も同様だろう。
「魏の黄初元年(220年)、夫余が魏に朝貢した際、その君主は「夫余単于」と呼ばれた。」
橐離国は、匈奴だったとも思われる。
匈奴には白人の血も入っていたので、東明は白人的顔立ちだったのかもしれない。
まあ、扶余・高句麗の王族はよくがんばったと思う。
それで、朝鮮民族が生き残ったのだろう。
이하와 같은 설이 있다.
「우선, 제일에 논형에, 해모수는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해모수는, 삼국사기의 시대까지 창작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럼, 해모수를 창작한 것은 누구인가.
(쿠다라)백제의 유력 씨족:해씨일 것이다.
해씨는, 스스로의 출자를 높이기 위해서 해모수를 창작했다.」
그럼, 부여의 동명왕의 출자의 리국은, 역시, 논형대로 북방에 있던 것은 아닌가.
부여의 전신은 와이이다.
이 와이인은, 실로 좋은 사람들이다.
규율 올바르고, 자연도에 따라 살아 있었다.
그러나, 와이인은 섬나라에서 살려면 좋을 것이지만, 대륙에서 살아 남을 수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사실, 흉노와 한의 항쟁으로 와이는 한에 내렸다.
그러나, 동명왕 이래, 와이는 부여로 바뀌어 변신했다.
유목민은, 정착민과 비교해 활동 범위가 넓고, 밖의 정보에도 접하고 있다.
그래서, 외교·정치에 적합하다.
그래서, 표면은 버리고, 경호원적으로 유목민의 왕을 세웠다고 생각한다.
당의 왕족은 유목민의 선비이며, 청의 왕족은 여진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사라져 한민족만이 잔.
부여에서도와 같이 조선 민족만이 남았을 것이다.
그리고, 배경으로서 부여는 아니고 고구려이지만, 지방의 지연적 집단이 대표자를 중앙에 두어, 5노부에 의한 중앙집권이 확립하며 갔다.
거기에 왕이 탔을 것이다.
부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위의 황 첫원년(220년), 부여가 위에 조공 했을 때, 그 군주는 「부여단우」라고 불렸다.」
리국은, 흉노였다고도 생각된다.
흉노에게는 백인의 피도 들어가 있었으므로, 토우메이는 백인적 얼굴 생김새였는지도 모른다.
뭐, 부여·고구려의 왕족은 잘 노력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조선 민족이 살아 남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