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代史のミステリーは 鉄で解ける.
夫余が印象深く読んだ本であったようだ.
古代史を 鉄によることで解いて行くことは面白い主張だが,
手短に読んで見れば敍述には相当な間違いがあることと見える.
1. 韓半島に遊牧民族が住んでいた. という敍述
先祖が遊牧民族だった人は一部いたが, 韓半島は遊牧ができる場所ではない.満洲でも西部と北部一部地域外には遊牧民はなかった. その下の高句麗が遊牧民族とかする内容も出るのに, 韓半島や高句麗に対する知識はだけでなく「遊牧」という概念に対してまともに理解することができないことと見える.
2. 中国人と原住民の連合政権で衛氏朝鮮が建国された. という敍述
朝鮮は元々建国されていたし,衛満は朝鮮に帰化して 秦故空地上下(漢と朝鮮の国境の 遼東 半島)を守る 博士に任命されてから, 後で 衛満の 乱で朝鮮の政権をさんだつしたのだ. 本の敍述は間違っている.
3. 中国は元々朝鮮半島の物心や国に関心がなかった. という敍述
漢代 以前にも朝鮮は燕と 秦と戦争があった. 漢代 以前は東方に対して関心が少なかったことは事実や,著者は 漢代 以前意訳社は分からなくて 漢代の歴史だけ読んで想像して記入したように見える.
4. 漢武帝の匈奴征伐の結果で 鉄を運ぶことができるようになって朝鮮を侵攻することに興味が生じた. という敍述
一応 遼東と北朝鮮がアジア最大の鉄鉱石 産地 中の一つなことは事実だが, 武帝が 鉄のために朝鮮を攻撃したということは無理である主張だ. 武帝が朝鮮に大きい鉄鉱があるというのが分かっていたということに疑問があって 漢にも鉄鉱は満足するほどに存在する. 鉄が不足な日本の立場(入場)を 漢に移入して思ったことではないか思う.
そして 武帝は匈奴征伐以前から朝鮮征伐を計画していた.
元朔元年秋東夷君南閭等口二十八万 人降為蒼海郡
元朔元年(B.C 128年) 秋, 東夷君南閭 など, 28万人が降伏して 蒼海郡を設置した.
出典 : 漢書
彭呉賈滅朝鮮置滄海之郡
(武帝の命令で) 彭呉は朝鮮を滅亡させるための 滄海の 郡を設置した.
出典 : 史記
B.C 128年朝鮮に属した の 君長 南閭が 武帝に降伏した事件だ. 位置は 漢と朝鮮の国境の 遼東 半島で見える. 武帝はその所に 滄海郡を設置したが朝鮮を滅亡させるためのことだと明らかにしている. 匈奴征伐以前から李美爪船征伐を計画しているという記録だ.
あの本の敍述は先後関係だけでなく目的でも事実と行き違う.
東伐朝鮮起玄楽浪以断匈奴之左臂
東に朝鮮を征伐して 玄と 楽浪を起こして匈奴の左腕を切り捨てた.
出典 : 漢書
武帝が朝鮮を征伐した理由は 鉄ではなく朝鮮が匈奴の主な同盟だったからだ.
真番旁衆国欲上書見天子又擁閼不通
朝鮮は 真番と多くの国々が天子と通じることを阻んだ.
得兵威財物侵降其旁小邑番臨屯皆来 服属方数千里
そして兵力と威勢, 財物を得て 東夷の色々小さな国々と 番臨屯を皆服属させた. その領土は四方で数千里に達した.
出典 : 史記
匈奴と朝鮮は 漢 帝国に対抗するために包囲網を形成していた. 隋唐代には高句麗が主軸だったがこの時代には匈奴が主軸だった.
5. 朝鮮は海から侵攻を予想す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し 武帝があっという間に朝鮮を滅亡させた. という敍述
その下に自分の主張が違ったという 史記 原文内容の要約を書いておいたが, 自分の根拠ない妄想だけで 司馬遷が違ったことだと否定している. 言う言葉を失った.
朝鮮-漢 戦争下記のように進行される.
漢武帝の朝鮮侵略軍は 5万の陸軍と 7千の水軍で編成されたが, 7千の 漢の水軍は朝鮮軍に敗れて戦争初盤に, 壊滅される. 漢の陸軍も〓水の戦闘で朝鮮軍に敗れて退却する. その後交渉が行き交ったが決裂される. 記録には朝鮮が降伏するために太子が行ってから決裂されたと書いているが, 朝鮮の太子が 1万の武装された兵力を導いて現われたと言うことを見れば実際はその記録とは少し違ったはずだ.
あの時 朝鮮相 歴谿卿が朝鮮王 右渠に何か建議したが受け入れられないで, 歴谿卿は 2千戸を導いて元々の朝鮮王朝がある 辰国で亡命する.
朝鮮相 歴谿卿は多分降参と和親を建議したことで, 朝鮮王 右渠が受けなかったことであるでしょう. 朝鮮王 右渠は首都 王倹城が包囲された時にも戦争を長続かなければならないと主張した鷹派だ. 交渉当時に太子に 1万の兵力をお供するようにしたことも, 敗れたことは 漢だから去りなさいという意味だったろう.
朝鮮相 歴谿卿が 辰国で亡命した以後から朝鮮軍に割れ目が生ずる. そのためか 2次 〓水の戦闘で朝鮮軍が敗れて首都である 王倹城が包囲される. 功城戦は数ヶ月間つながったが, 結局内部の裏切りで朝鮮王右渠と 大臣成己が暗殺されて 城は降伏するようになる.
海から水軍の攻撃は簡単に支えたし, 朝鮮があっという間に滅亡したのでもない.
朝鮮は海から侵攻を予想す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し 武帝があっという間に朝鮮を滅亡させたという本の敍述は恣意的な曲解だ.
見るように敍述で相当な間違いがある本だ. 武帝が 鉄を得るために朝鮮を侵攻したということは無理な主張と見えるが, 朝鮮で匈奴に供給される 鉄を阻むために朝鮮を侵攻したと言ったらそんなこともできるでしょう.
その下はほとんど読まなかったが, 妄想だけであるうわごとがつながることと見える.
朝鮮半島の王は中国に承認受けなければならない 2000年これとか
侵略した韓人が土着民を奴隷のように使って鉄鉱石を掘りだしたとか
倭には長剣を与えて高句麗には短剣だけ与えたとか
韓半島の西の方は 馬が通うことができないし東は平原だから 馬が通ったとか
一番目から日本で有り勝ちなお決まり偽りで
土着民が奴隷のように鉄鉱石を掘りだしたとかあの本著者の純粋妄想に過ぎない. 最初に 楽浪で 漢に鉄を移したということから根拠から全くない. 楽浪の土着勢力尊属に対しても全然分かることないようだ.
長剣とか短剣とかただ著者の妄想に過ぎない. 考古学籍で高句麗には列島より先に 夫余係の長剣と中国係の 太刀が現われる.
そして韓半島地形は東高西低で西の方が平野で東が山岳だ. 軍と馬も大部分西の方に通った.
.この位まで行ってほしい言葉を失うほどだが簡単に書いておく.
고대사의 미스테리는 鐵로 풀린다.
https://buly.kr/E790P0i
夫余가 인상 깊게 읽은 책 인듯 하다.
고대사를 鐵에 의한 것으로 풀어나가는 것은 재미있는 주장이지만,
간략하게 읽어보면 서술에는 상당한 오류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1. 한반도에 유목민족이 살고 있었다. 라는 서술
조상이 유목민족이었던 사람은 일부 있었겠지만, 한반도는 유목을 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니다.만주에서도 서부와 북부 일부 지역 외에는 유목민은 없었다. 그 아래 고구려가 유목민족이라든지 하는 내용도 나오는데, 한반도나 고구려에 대한 지식은 뿐만 아니라「유목」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 중국인과 원주민의 연합정권으로 衛氏조선이 건국되었다. 라는 서술
조선은 원래 건국되어 있었고, 衛滿은 조선에 귀화하여 秦故空地上下鄣(漢과 조선의 국경의 遼東 반도)을 지키는 博士에 임명되었다가, 나중에 衛滿의 亂으로 조선의 정권을 찬탈한 것이다. 책의 서술은 잘못되어 있다.
3. 중국은 원래 조선반도의 철이나 나라에 관심이 없었다. 라는 서술
漢代 이전에도 조선은 燕과 秦과 전쟁이 있었다. 漢代 이전은 동방에 대해 관심이 적었던 것은 사실이나, 저자는 漢代 이전의 역사는 알지 못하고 漢代의 역사만 읽고 상상하여 기입한 것으로 보인다.
4. 漢武帝의 흉노 정벌의 결과로 鐵을 운반할 수 있게 되어 조선을 침공하는 것에 흥미가 생겼다. 라는 서술
일단 遼東과 북한이 아시아 최대의 철광석 産地 중 하나인 것은 사실이지만, 武帝가 鐵을 위해 조선을 공격했다는 것은 무리인 주장이다. 武帝가 조선에 큰 철광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에 의문이 있고 漢에도 철광은 만족할 정도로 존재한다. 鐵이 부족한 일본의 입장을 漢에 이입하여 생각한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그리고 武帝는 흉노 정벌 이전부터 조선 정벌을 계획하고 있었다.
元朔元年秋東夷薉君南閭等口二十八萬人降爲蒼海郡
元朔元年(B.C 128년) 가을, 동이 君南閭 등, 28만人이 항복하여 蒼海郡을 설치하였다.
出典 : 漢書
彭吳賈滅朝鮮置滄海之郡
(武帝의 명령으로) 彭吳는 조선을 멸망시키기 위한 滄海의 郡을 설치하였다.
出典 : 史記
B.C 128년 조선에 속한 의 君長 南閭가 武帝에 항복한 사건이다. 위치는 漢과 조선의 국경의 遼東 반도로 보인다. 武帝는 그곳에 滄海郡을 설치했는데 조선을 멸망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흉노 정벌 이전부터 이미 조선 정벌을 계획하고 있다는 기록이다.
저 책의 서술은 선후 관계 뿐만 아니라 목적에서도 사실과 어긋난다.
東伐朝鮮起玄菟樂浪以斷匈奴之左臂
동쪽으로 조선을 정벌하여 玄菟와 樂浪을 일으켜 흉노의 왼팔을 잘라내었다.
出典 : 漢書
武帝가 조선을 정벌한 이유는 鐵이 아니라 조선이 흉노의 주요한 동맹이었기 때문이다.
眞番旁衆國欲上書見天子又擁閼不通
조선은 眞番과 여러 나라들이 천자와 통하는 것을 막았다.
得兵威財物侵降其旁小邑真番臨屯皆來服屬方數千里
그리고 병력과 위세, 재물을 얻어 東夷의 여러 작은 나라들과 真番臨屯을 모두 복속시켰다. 그 영토는 사방으로 수천리에 달했다.
出典 : 史記
흉노와 조선은 漢 제국에 대항하기 위해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었다. 隋唐代에는 고구려가 주축이었지만 이 시대에는 흉노가 주축이었다.
5. 조선은 바다로부터 침공을 예상하지 못했고 武帝가 순식간에 조선을 멸망시켰다. 라는 서술
그 아래에 자신의 주장이 틀렸다는 史記 원문 내용의 요약을 써놨지만, 자신의 근거 없는 망상만으로 司馬遷이 틀렸던 것이라고 부정하고 있다. 할 말을 잃었다.
조선-漢 전쟁 아래와 같이 진행된다.
漢武帝의 조선 침략군은 5만의 육군과 7천의 수군으로 편성됐지만, 7천의 漢의 수군은 조선군에 패하여 전쟁 초반에, 괴멸된다. 漢의 육군도 浿水의 전투에서 조선군에 패배하여 퇴각한다. 그 후 협상이 오갔지만 결렬된다. 기록에는 조선이 항복하기 위해 태자가 갔다가 결렬됐다고 쓰여있지만, 조선의 태자가 1만의 무장된 병력을 이끌고 나타났다고 하는 것을 보면 실상은 그 기록과는 조금 달랐을 것이다.
그 때 朝鮮相 歷谿卿이 조선왕 右渠에게 무언가 건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歷谿卿은 2千戶를 이끌고 원래의 조선왕조가 있는 辰國으로 망명한다.
朝鮮相 歷谿卿은 아마 항복과 화친을 건의했던 것이고, 조선왕 右渠가 받지 않았던 것일 것이다. 조선왕 右渠는 수도 王儉城이 포위되었을 때에도 전쟁을 지속해야 한다고 주장한 강경파이다. 협상 당시에 태자에게 1만의 병력을 동행하게한 것도, 패배한 것은 漢이니 떠나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朝鮮相 歷谿卿이 辰國으로 망명한 이후부터 조선군에 균열이 생긴다. 그래서인지 2차 浿水의 전투에서 조선군이 패배하여 수도인 王儉城이 포위된다. 공성전은 몇달간 이어졌지만, 결국 내부의 배신으로 조선왕 右渠와 大臣成己가 암살당하고 城은 항복하게 된다.
바다로부터 수군의 공격은 간단하게 막혔고, 조선이 순식간에 멸망한 것도 아니다.
조선은 바다로부터 침공을 예상하지 못했고 武帝가 순식간에 조선을 멸망시켰다는 책의 서술은 자의적인 곡해이다.
보듯이 서술에서 상당한 오류가 있는 책이다. 武帝가 鐵을 얻기 위해 조선을 침공했다는 것은 무리한 주장으로 보이지만, 조선에서 흉노로 공급되는 鐵을 막기 위해 조선을 침공했다고 한다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아래는 거의 읽지 않았지만, 망상뿐인 헛소리가 이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조선반도의 왕은 중국에 승인 받지 않으면 안되는 2000년 이라든가
침략한 한인이 토착민을 노예처럼 사용해 철광석을 파냈다든가
倭에는 장검을 주고 고구려에는 단검만 줬다든가
한반도의 서쪽은 馬이 다닐 수 없고 동쪽은 평원이라 馬이 다녔다든가
첫번째부터 일본에서 흔한 상투적 거짓이고
토착민이 노예처럼 철광석을 파냈다든가 저 책 저자의 순수 망상에 불과하다. 애초에 樂浪에서 漢으로 鐵을 옮겼다는 것부터 근거부터 전무하다. 樂浪의 토착 세력 존속에 대해서도 전혀 아는 것 없는 것으로 보인다.
장검이라든지 단검이라든지 단지 저자의 망상에 불과하다. 고고학적으로 고구려에는 열도보다 먼저 夫餘계의 장검과 중국계의 太刀가 나타난다.
그리고 한반도 지형은 동고서저로 서쪽이 평야고 동쪽이 산악이다. 軍과 馬도 대부분 서쪽으로 다녔다.
.이 정도까지 가면 할 말을 잃을 정도지만 간단하게 써둔다.